‘거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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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관리자
  • 승인 2010.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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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선(禪)과 함께 이러구러

가을비가 가을 숲을 적시니 온통 비취빛이로군.

그대, 어디서 미륵을 찾는가.

- 양기방회(楊岐方會), 『양기록(楊岐錄)』

잠시 비좁은 양옥에서 전세를 살 때, 내 방과 옆집 사이의 거리는 채 3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다. 한밤중 그네들의 PVC 차양에 빗물이 떨어지면, 혼자서 조용히 미치곤 했다. 죽음의 배경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자문하면서 기타를 튕기고 소주를 마셨다.

아파트에선 외벽과 베란다 사이의 이격 탓에 우성(雨聲)이 엷다. 애당초 닫힌 구조여서 확장공사를 한다손 별무소용이다. 하긴 시야를 트는 데는 효과가 있다. 베란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거실에 앉아 우중의 풍경을 한눈에 빨아들인다. 빗물에 시선을 적시는 일로, 전보다 시시해진 청각의 즐거움을 벌충한다. 흠뻑 젖어서 말랑말랑해진 세상은 한결 만만해 보인다. 비가 내리면 열(熱)도 내린다. 부쩍 철이 든 동정심이, 툭하면 나서기 좋아하는 적개심을 막아선다. 너도, 나처럼, 아프구나.

전쟁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선뜻 지갑을 열 순 있어도, 제집이 불타고 팔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자청할 사람은 극소수다. 비를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기껍지만, 비를 맞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질색이다. 탈모가 빨라질까 두렵고, 행인들이 ‘물먹은’ 나를 비웃을까 걱정된다. ‘한번 비에 젖어본 자는 더 이상 비를 두려워 않는다’는 격언은 맑은 날에만 멋지게 느껴진다. 삶을 다만 관조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삶도 흔쾌히 받아들이리란 생각. 그냥 무대에 한번 올라갔다 내려오는 일인데 배역이 거지였든 불구였든 무슨 대수인가.

그러나 삶은 존재. 하이데거가 한숨짓던 존재. 내 뜻과는 상관없이 무작정 내던져진 존재. 애당초 출구란 없는 존재. 정해진 인연의 길을 잠자코 걸어가야 하는 존재. 주어진 조건의 변화에 따라 넘어지고 뭉개져야 하는 존재. 목구멍에 뭐든 넣어야 하는 존재. 말이 좋아 연기(緣起)고 상생(相生)이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 오매불망, 남이 만든 게임의 법칙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존재. 시시콜콜, 남이 저질러놓은 문명과 제도에 참견하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해지는 존재. 하늘이 무너져도 폐막이란 없는 존재. 태어나면 죽어야 하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 존재.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

닭은 통닭을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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