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광고사진을 전공한 나는 우연한 기회에 호주 시드니에서 ‘시드니 비엔날레 예술제’에 참가한 순수예술가의 작업을 도와주게 되었다. 이때 광고작업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작품의 깊이와 자유스러움에 빠져들었다. 방랑기 많던 나는 그들의 작업에 매료되었고,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순수예술 공부와 작업을 병행하면서 자연스레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다민족국가인 미국, 특히나 뉴욕은 개성 있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다양성과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흥미를 느꼈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외면에서부터 내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탐구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이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진지했으며, 작업에 가장 몰두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작업을 하면 할수록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의 메시지에 대한 수많은 의문점이 생겼다. 이런 생각을 채 정리하지 못하고 발표한 작품의 이미지는 동양철학이나 불교철학에서 인용한, 나의 짧은 지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허상일 뿐이란 자책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님 부고소식이 들려왔고,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방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나를. 비우는. 여행.】
어느 날 월정사 단기출가학교 프로그램을 방송매체를 통해 접했을 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가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느덧 참가신청을 해놓고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그동안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풀지 못한 숙제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으면서 이미 마음은 월정사로 향해 가고 있었다.
삭발식 이후 행자복으로 갈아입고 수계식 전까지, 본격적인 행자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습의 시간이 있었다. 아직은 적응기간이라 지도하시는 스님들께서도 그리 엄격하게 대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20여 년 전 군 생활 이후 이런 단체생활은 처음인지라 육체적·정신적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다행히 갈마(면접)를 통한 스님들과의 대화 이후 새롭게 마음을 다 잡고 수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식으로 단기출가학교 행자가 되었다. 내게 주어진 한 달간의 시간 동안,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고 하심과 묵언을 기본으로 수행에 정진하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월간불광 과월호는 로그인 후 전체(2021년 이후 특집기사 제외)열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