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에서 깨어나니 산나물 향 그윽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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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에서 깨어나니 산나물 향 그윽하네
  • 관리자
  • 승인 200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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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유희[禪語遊戱]

그러나 내가야의 번창과는 달리 외가야는 거의 폐사지로 남아있다. 용기사, 법수사는 여전히 주초와 석조물 몇 점으로 옛 자취만 아련하고 심원사는 최근에야 복원의 손길이 닿아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 성주 백운동은 잘 닦인 도로와 널따란 주차장, 식물원, 호텔에 온천탕까지 갖추어진 관광지가 되었지만, 20여 년 전 학인시절에 가야산 등반을 마치고 이쪽 방향으로 내려올 때면 허름한 두부집 내지 할머니 칼국수집에서 허기를 달랜 한적한 시골이었다. 비포장 길을 따라 눈은 골산을 바라보고 신발에 먼지 폴폴 날리며 도경계인 고개를 넘어 두 시간 거리쯤 걸어 합천 가야면의 삼거리에서 버스를 한참 기다렸다가 타고서 해인사로 올라가곤 했다.

용기사는 현재 해인사 큰법당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던 절이었다. 불상 규모를 봐서도 작은 절이 아니었을 텐데 지금은 거짓말같이 아무 것도 없는 빈 골짜기에 안내판만 한 개 덩그러니 놓여져 옛 흔적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법수사 삼층석탑은 지금도 훤출한 자태를 뽐내며 덕곡들판을 굽어보고 있고 근처에는 높다란 축대와 단아한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순왕의 막내아들인 범공(梵空) 스님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우가 1,000칸을 넘었고 100여 개의 암자가 딸린 대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네사람들이 ‘장군젓가락’으로 부른다는 당간지주는 당산나무와 어우러져 그 본업을 잃고 서낭당이 되어 허리에 금줄을 두르고 있는 생경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래도 절터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심원사는 이제 제대로 주인을 만나 그 옛날 위용을 되찾아가고 있다. 절 입구에는 이 고장 출신이라는 이직(李稷, 1362~1431)의 시조비가 본의 아니게 이정표 노릇을 하고 있다. 여러 선지식들이 일찍이 복원의 뜻을 가졌으나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았고 이제 터가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 얼기설기 남아있던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차츰차츰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창건주 화상은 눈썰미가 있고 미학적 안목이 뛰어난지라 여러 채의 당우들이 어울리는 크기로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조화로운 가람을 한 동씩 앉혀내고 있었다.

개인문집 『독곡집』에서 심원사에 대한 글을 남긴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해서와 초서를 잘 쓰는 당대의 명필이며, 이성계와 친구인 인연으로 함흥차사로 가서 그의 마음을 돌려 한양으로 모시고 온 공로가 『명신록(名臣錄)』에 기록되어 있다. 뒷날 성삼문까지 배출한 명문가이기도 하다. 호를 ‘독곡(獨谷)’ 즉 외로운 골짜기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의 가풍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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