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미술] 우리 불교 속의 스승, 조사신앙와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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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미술] 우리 불교 속의 스승, 조사신앙와 승탑
  • 유근자
  • 승인 200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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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미술
▲ 그림1>> 염거화상탑, 통일신라(844년), 높이 1.7m, 국보 104호, 국립중앙박물관

 

조계종조와 조계종

속가(俗家)와 불가(佛家) 모두 스승과 제자의 관계만큼 소중히 여기는 관계는 없다. 살면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매일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행운을 꿈꾸며 오늘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조계종단의 종조(宗祖)는 통일신라 말에 활약했던 도의(道義) 스님이고, 중흥조(中興祖)는 고려 말의 보조지눌(1158~1210) 스님과 태고보우(1301~1382) 스님이다. 1960년대 이후에 탄생한 조계종의 종조로 왜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창시자인 도의 스님을 종조로 하고, 보조지눌 스님과 태고보우 스님을 중흥조로 한 것일까? 거기에는 우리 불교계의 아픈 상처가 자리잡고 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시작된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오랜 다툼이 그것이다.

비구승과 대처승의 기나긴 분쟁으로 불교종단은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분종(分宗) 되는데 그 핵심에는 종조에 대한 논쟁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 후기에 활동했던 보조지눌 스님을 종조로 할 것이냐 아니면 태고보우 스님을 종조로 할 것이냐는 논쟁이 그것이다. 비구 측에서는 보조지눌 스님을, 대처 측에서는 태고보우 스님을 종조로 주장하게 되었는데 보조지눌 스님을 종조로 인정할 수 없었던 많은 비구승들이 태고종으로 종적을 옮기기도 했다.

이러한 여파는 조계종과 태고종 분종 이후에 조계종 내부에서도 논쟁이 계속되어 결국 통일신라 말에 활약한 도의 스님을 종조로 삼았다. 그러면 도의 선사는 누구일까?

새로운 불교 선종의 전래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을 중개지로 삼았다. 남방의 바닷길을 통한 불교의 유입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을 통한 경우가 많았다. 많은 스님들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수행과 함께 선진적인 중국불교를 받아들인 후 귀국하여 새로운 종파를 창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회창 연간(814~846)에 중국에는 커다란 변이 일어나는데 바로 회창 폐불 사건이다. 이로 인해 당시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신라의 스님들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돌아온 대부분의 스님들은 선종(禪宗)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이들은 교종 중심의 당시 신라 불교와 달리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선종의 산문(山門)을 열었다. 문경 봉암사의 희양산문,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 보령 성주사의 성주산문, 영월 흥녕사의 사자산문, 강릉 굴산사의 사굴산문 그리고 해주 광조사의 수미산문 등이 있다.

도의 스님은 바로 장흥 보림사에 근거를 둔 가지산파의 개조(開祖)로 821년 당나라로부터 귀국해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로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여 제자 염거(廉居, ?~844) 스님을 길러냈고, 염거 화상은 체징(804~880) 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여 그로 하여금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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