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앙카레와 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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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앙카레와 佛敎
  • 관리자
  • 승인 2009.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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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앙카레(H.Poipacare 1871~1921)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의 사상적인 격동기에 걸쳐 유럽의 지성을 대표하는 블란서가 낳은 대 수학자이며 사상가였다.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대천재임에는 틀림 없었으나 대학입시에는 간단한 수학 문제 조차 못풀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미 전채 소년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오히려 시험관들 자신이 먼저 문제를 잘못 낸줄 알고 특별히 고려해서 합격시켜 주었다. 그는 관학자라기 보다는 서구적인 교양에 통달한 폭넓은 사상가였고 특히 감수성이 예민했다. 처음 엽총을 손에 들었을 때 작은 새 한 마리를 잘못 죽이고 다시는 총을 손에 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슈바이처 박사가 일찍이 생의 무서움을 깨닫고 누가 새를 잡을까봐서 새를 쫒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방불케 한다.

그는 대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성향이 종교적이였던 것 같다. 단순한 과학적인 문제에 골몰할 때도 끊임없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반성했었다. 그는 수학의 대정리를 많이 발견해서 20세기 수학의 방향을 제시했고 그가 저술한 (과학과 방법) (과학과 가설)등은 지금도 명저로써 널리 읽히고 있다. 특히 그 책의 가장 재비있는 부분은 어떻게 해서 그가 그런 대정리를 발견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가 설명하는 대정리 발견의 동기는 일반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수학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다가 그 문제를 완전히 잊고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산보나 여행의 도중 우연히 하나의 생각이 섬광처럼 떠 오른다는 것이다. 잠자고 있는 방심상태에서 의식의 밑바닥에 숨었던 것이 완전히 익어서 의식의 표층에 뛰어나온 것이다. 이때는 이미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어있다.

수학은 그 과학성을 논리에 두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分別智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것은 진리에의 길은 단순한 논리적인 추구나 추론의 관정에서 나오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블란서 심리학회는 포앙카레의 경험을 들고 세계의 지도적인 수학자에게 어떻게 해서 (수학적인 정리를 발견하는가?)를 문의했다. 답은 한결같이 포앙카레의 경우와 같았다. 이 발표로 전통적으로 분별지만을 지성의 본질이라고 믿어온 서양인들은 새삽 人間智 의 비밀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불교도에게는 하나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佛敎徒는 無差別智의 작용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知情意와 感覺이 일시에 작용하는 것이며 본인은 그것을 전연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수학의 정리(진리)를 얻는다는 것은 形式的으로는 이미 알려져 있는 지식을 토대로하고 이들은 조합해서 논리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그 조합을 만드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그 방법이 무한히 많아서 그것이 의미있고 차원높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일일이 그 조합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이 방법을 일일이 따지다가는 人智의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 수학의 진리란 수학자에게는 (사사무욕법계)-최상의 세계이다. 그것에 이르는 길은 일일이 조합을 따지는 분별지가 아닌 무분별지라야 된다는 것이 포앙카레의 결론이다.

- II -

포앙카레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불교의 세계와 전연 접촉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수학적인 교양을 등에 업은 당시의 지도적 철학가였다. 그의 사색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불교의 교리를 전연 의식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사삼이 철저한 지성적인 활동을 하다 보면 간단히 불교적인 사상과 교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유물론자 레닌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상가에게는 험담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포앙카레의 (과학과 가치)를 공격하여 (위대한 과학자이지만 왜소한 철학자)라고 했다. 철학적 사색의 대상은 항시 시대적 사회적 제한이 따라 다닌다. 그러나 빈약한 철악에서 위대한 과학이 나올수는 없다. 포앙카레가 얼마나 깊은 사색의 세계를 헤매는가를 그의 종교관에서 살펴보자.

(종교적 태도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安心立命”의 경지를 바라는 자와 또 하나는 초월자로부터 “신비적인 사랑”을 바라는 자다. 이 두가지가 한 사람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전자는 정교도에게 또 후자는 이교도들에게 볼수 있다. 과학자가 과학적인 진리에 대하는 신앙은 正敎徒가 “안심입명”의 요구에서 얻어내는 신앙과는 다르다. 과학적인 “진리에 대한 사랑”과 “안심입명을 바라는 사랑”을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상대적인 우리의 세계에 있어서는 모든 “안심입명”이라는 하나의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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