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화산을 다녀와서(Ⅱ)-승신불(等身佛)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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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산을 다녀와서(Ⅱ)-승신불(等身佛)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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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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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덕 칼럼

  청양현(靑陽縣) 오개진(五介鎭)이라는 곳을 지나 구화산을 향하여 달리는 차창 밖으로, 구화하(九華河) 맑은 강물을 끼고 서향(西向)하면 왼편 멀리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왼쪽은 연봉으로 한없이 이어졌고 중앙과 오른쪽 연봉은 구름 위에 솟아 있다.

  냇물이 만나는 십자로 근처에 이성전(二聖殿)이니 감로사·용지암·일숙암(一宿庵)이니 하는 사암과 일천문·이천문이라는 건조물이 있어서 여기가 바로 구화산 성역의 입구임을 표시한다. 여기서부터는 구곡양장의 산길이 화성사앞 구화가(九華街)까지 계속되는데, 이성전의 유래를 들으면 그 당시 이 입구 근처가 인가 있는 마을이었고 그 위로는 무인공산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전하는 말로 김교각 스님이 구화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모국에 잇는 그 어머니 성정 왕후는 친정동생인 소우(昭佑)·소보(昭保)를 보내어 귀국을 종용하지만 그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도로 김교각 스님의 감화를 받아 구화산에 머루르게 된다.

  그러나 세속의 습이 너무 깊이 들어있는 귀족출신인 이 두 외숙은 음주육식을 끊을 수가 없어 산 아래 마을로 쫓겨 내려와 살게 되는데, 구화산 전체의 풍속이 아직도 비린 것, 누린 것을 가리어 안 먹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금가축(家禽家畜)은 안 키웠으면 특히 돼지는 그림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민국초년까지도 소면·소채·소차 위주의 생활이었다고 하니 우리나라 절풍속과 흡사하다 하겠다.

  이렇게 계를 범하고 쫓겨 내려왔어도 끝까지 생질 김굑각 스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다가 돌아간 두 사람을 위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성전을 세워 제사를 지내어 내려오는데 지금까지 육식도 허용하는 훈소불구(葷素不拘)라 하니 재미있는 전설이다. 이 두 사람은 수도생활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그 당시의 마을사람들과는 잘 지냈고 존경도 받았기에 이성(二聖)의 이름을 얻었으리라.

  그 당시 이 마을 어귀에서 구름에 항상 가려 잇는 구화산 정상을 쳐다볼 때 그곳은 울창한 수목과 맹수만이 횡행하는 참으로 아득하기만한 느낌이었으리라. 지금은 버스길이 나 있는 구화가(화성사 앞) 마을이지만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오려면 기진맥진한 중생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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