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의 提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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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의 提起
  • 관리자
  • 승인 2009.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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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강좌(3)

싯다르타 태자가 농경제(農耕祭)에서 명상한,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고 하는 불교 명제(命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추구는 훨씬 뒤 성인(成人)이 된 싯다르타 태자의 사문유관(四門遊觀)에서 극적으로 고조됩니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 부처님의 생애를 그리고 있는 경에 따르면, 싯다르타 태자는 가필라성의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네 성문을 나갔을 때, 그 곳에서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과, 수행인(修行人)을 보고서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의 괴로움에 대한 눈이 열려 출가 수행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경전은 하늘 사람(天人)들이 보살<싯다르타 태자>이 출가수행 하여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때가 가까워진 징조를 보이기 위해서 정거천(淨居天)으로 하여금 노인,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수행인의 모습으로 나타내게 해서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같이 말하는 경전의 의도는 싯다르타 태자가 네 개의 성문을 나가서 확인한 사실과 뒤에 부처가 된 사실을 보다 강하게 극화(劇化)하기 위해서입니다만, 이 사문유관은 낳아서 늙고 병들어 이윽고는 죽는 <生老病死> 네 가지 괴로움을 바로 눈앞에서 직접 본 것이며, 이것은 싯다르타 태자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체험인 것입니다. 불교에 있어서 종교적 체험은 직관(直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같은 불교의 직관에 대해서 미국의 물리학자 < 로버트 오펜하이어>가 한 이여기는 흥미가 있습니다. <오펜하이어>는 일과(日課)처럼 불경을 비롯한 인도의 고전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기자가 『현대의 자연과학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어 보이는 불경 등을 왜 읽는가?』고 물었습니다. 이에 <오펜하이어>는

『현대의 우리들이 분석이나 실험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는 곳을 고대 인도의 성인들은 직관에 의해서 도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이 남긴 고전을 읽으면 나는 비상한 인스프래이션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왜 이야기를 인용하는가 하면, 종교적 체험이란 것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한 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과학이 현실을 토대로 하듯이 불교도 현실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의 사문유관이 하늘 사람이 동원되는 경전의 허구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의 네 가지 괴로움으로 일관하는 인생의 한 평생을 싯다르타 태자가 다 살아버렸다는 강력한 시사를 하는 것은 그 종교적 체험의 현실성에 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사문유관에서 네 가지 인생의 괴로움에 대해 눈이 열려 이 세간을 싫어하여 출가수행을 결심하게 된 이래, 괴로움은 불교의 명제가 되고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원래종교란 현실의 괴로움을 벗어나 괴로움이 없는 안온한 이상의 세계를 얻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출발점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불완전한 현실의 세계를 바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현실에 불만이 없거나 괴로움이 없다면 종교나 이상을 구할 필요는 없어집니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의식을 가진 사람의 눈에 현실의 세계가 완전하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불완전하고 괴로움에 차 있으며 싫어해야 할 세계입니다. 불교에서 이 싫어해야 할 세계를 싫어한다고 해서 불교를 염세주의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지극히 작은 불교의 한 단면만을 보고서 하는 말입니다. 불교는 괴로움으로 찬 불완전한 이 현실세계를 싫어하기는 하되 결코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괴롭고 불완전한 세계, 즉 예토(穢土)에 이상세계인 정토(淨土)를 세우려는 정토사상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현실 세계가 싫어 버리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진흙 속에서 돋아나와 한 점 진흙도 묻지 않은 꽃을 피우는 것으로 충분히 대변되리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이상 세계의 건립을 위해 철두철미한 노력을 경주합니다. 만약 한 중생이라도 이 사바세계에 남아있는 한은 결코 성불(成佛)하지 않고 그를 제도하겠다고 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정신이 그 예이며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천개의 손이 모자라고 천개의 눈이 모자라며 천백억(千 百億)의 화신(化身)을 다해서라도 중생을 건지겠다는 관세음보살이 그 노력의 대표적 예입니다. 한 중생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는 이 세계의 조그만 부분일지라도 어둡고 괴로운 곳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현실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동시에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이상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이상을 불교에서는 열반(涅槃), 또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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