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장 경에 발목 잡힌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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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장 경에 발목 잡힌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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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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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간송미술관장 최완수

  어느 작가 한 사람이 이런 술회를 한 기억이 난다.  만약 자신의 청소년기에 명작들을 접하지 못했다면, 아마 자신은 지금쯤 돈을 벌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모리배가 되었던 지, 국민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기에 급급한 국회의원 등 속의 정치인이 되었던 지, 그도 저도 아니면 밤거리를 떠도는 범죄자의 생을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 술회의 내용이란 기실 눈에 보이는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위력, 세속적인 부나 명예를 뛰어넘어 인간을 근원적으로 뒤흔들어 놓고 바꾸어 놓은 그 '무엇'에 대한 외경심을 그렇게 둘러서 표현 했을 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자에서 떠돌고 명리를 구하여 평생을 허비한다.  혹은 자신의 명분을 주장하기 위하여 거리로 광장으로 달려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그 가운데 몇몇은 어두운 골방에서 등잔의 심지를 돋으며 남아 있다.

  최완수 선생을 만나기 위해 성북동 간송미술관으로 걸어 올라가면 나는 그런 저런 생각을 했다.  정신의 어둑신한 골방, 그렇게 남아 있게 하는 그 '무엇'의 힘은 어떤 것일까.

  최완수 선생께 그런 뜻의 질문을 드리자, "그저 타고난 것이지요" 라는 다분히 불교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인연이라든지,  부모미생전이라는 그런....

  그는 1942년 광복이 되기 세 해 전에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주변 동리에서 천석꾼지기라 불리웠으나 그 정도에서 미치치 않아도 가산 규모가 넉넉한 살림의 집안이었다.  가혹한 일제 식민치하에서도 그런 만큼 전통적인 생활규범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그 규범들속에는 집안 여인네들이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하고, 큰 스님께 법문 듣는 것을 사랑채의 남정네들이 짐짓 모른체 하는 조선 사대부 특유의 정신적인 이원성도 들어 있다.

  소년 최완수는 조모가 늘 ' 만공 큰 스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는 것을 자연스레 보며 자랐다.  만공 스님이 주석 하시던 수덕사 정혜사가 바로 30리 남짓, 지척인 거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조모와 의형제를 맺고 부친의 은사 스님 (부친의 형제들은 모두 이 스님의 유발상좌였다)인 덕화 스님의 집의 원찰이다시피한 가까운 보덕사에 계셨다.  비구니인 덕화스님은 지아비가 어느날 입산하자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절로 들어가 딸과  함께 출가한 분이니 부설거사와 묘화부인, 딸인 월명에 얽힌 아름다운 설화를 몸소 보여준 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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