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력 바라밀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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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력 바라밀생명
  • 관리자
  • 승인 2009.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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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나의 다짐

󰊱행복했던 시절

저는 강원도 태백이 고산준령이 출렁거리는 듯한 아흔아홉구비의 웅장한 대관령을 뒤로 하고 푸른 물결이 굽이치는 도해를 바로 안은 유서깊은 고도이며, 4계절을 고루 살기 좋은 고장 강릉에서 안동권문(權門)의, 당시로서는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의 7남매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나라의 전형적인 가정의 분위기가 그러하듯이 저희 집안의 할아버지나 아버님께서는 전통유교, 한학을 공부하셨고 할머니나 어머님께서는 정에 다니시며 집안의 평안과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강릉시내 한복판에 만해(萬海) 한용운선사님과 인연이 깊은 관음사(포교당)이 있었고, 저희집은 바로 길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절과 같이 있는 「금천유치원」에 2년 다녔기 때문에 저의 어린시절 놀이터는 자연히 절 경내가 되었고, 그런 까닭에 저는 법당에 계신 부처님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 있었으니, 제 어린 가슴에도 부처님 모습을 항상 장엄하고 인자하시며 성스럽고도 원만한 아름다움 그 자체이셨습니다.

당시는 자연현상에 의한 피해가 자주 있었던 시절이어서, 한여름 장마철에 홍수가 지거나 한 겨울밤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시내 일대를 휩쓰는 재난을 당할 때면 강릉 시민들은 관음사를 그 대피처로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절쪽으로는 피해가 없었으니, 이 또한 부처님께서 당신의 위신력으로 강을 시민들을 돌보아 주셨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재가 직접 겪었던 사실은 천구백 칠십년 봄이라고 기억됩니다. 집 부근의 양장점 점원이 실수하여 다리미를 얹어놓는 연탄 화덕가에 석유통을 엎지르는 바람에 인화되어 강릉시내 중심가가 다 타게 되었습니다. 마침 저희집 옆건물은 금성전자 대리점이었는데, 그 건물외벽은 내화구조로 되어 있고 건물 내부도 방염처리를 한터여서, 화재는 곧바로 저희집 쪽으로 전이가 되지 못하고 우선회하여 일대의 상가점포 등 중심가를 다 태우고 급기야는 저희집 처마에 옮겨 붙기 직전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그 아수라의 현장에서도 평소 신심이 깊으셨던 저의 어머님께서 길건너편 절쪽을 향하여 계속 절을 하시며 「나무관세음보살」을 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왠일입니까? 그렇게도 세차게 기승을 떨치며 타들어 오던 화마가 바람이 자면서 반대방향으로 불길이 잡히기 시작하여, 저희집은 화재를 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셨던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즐거웠던 학창시절과 결혼생활

어머님 손에 이끌려 절에 다니면서 자란 저는 고등학교 시절 강릉 불교학생회에도 몸담았으며 소년시절을 별 탈없이 지냈고, 재수를 한 끝에 1979년 서울의 모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4월 같은 클라스에서 공부하던 제 아내를 사귀게 되어 4년을 꼬박 교제한 끝에, 졸업식을 치른지 일주일뒤 양가 부모님들과 친지들이 축복 속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같은 때 같은 학교 같은 전공으로 인생의 동반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다음해 1975년 10월 현재의 직장에 입사하였고 우리의 결혼생활은 나름대로 행복하였습니다. 아이는 셋<2男 1女>을 낳았습니다.

 

󰊳닥친 불행

그런데 1984년 4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불행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도 건강하던 아내가 유방암에 걸린 것입니다. 왼쪽 가슴에 녹두알 보다도 작은 그 무엇이 만져졌을 때 담당의사는 일종의 종기이며 수술해서 절제해 버리면 별것 아니라고 얘기했습니다. 곧이어 수술에 들어갔고 수술후 떼어낸 조직을 검사한 결과. 우리의 의학학회에 3번째로 보고되는 희귀한 경우의 미세암으로서 조기 발견이기 때문에 염려없을 것이라고 의사는 자신있게 장담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불안했기 때문에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유방암의 권위자라는 의사도 그정도의 암종이라면 굳이 미국에 오지 않고 한국에서 잘 치료하면 별탈없을 것이라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저는 돌아왔었습니다. 저와 집안에서는 가능한 치료방법과 약재를 동원했지만 서서히 아내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내의 병은 유방암 중에서도 국소적 암이 아닌, 전이성 유방암, 즉 혈액의 임파에 전이가 되어 전신에 퍼지는 암이었던 것이었음을…

아내의 세상인연이 다하었던지, 아니면 제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선지, 아내는 저와 우리를 아껴주시던 모든 이들의 원과 바램을 떨쳐버리고 하얀 목련이 피었던 그날 (1986.4.8) 그리도 총총히 속세의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난지 정확히 하루도 안빠지는 만 16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과 나의발심 삼라만상이 찰라지간인 것을-

저는 그날 이후 죽음이란 절대적 명제에 대한공포와 번뇌에 사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한 생각 일 때마다 저는 절망했고 한 티끌 일 때마다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깊은 밤 아이들 몰래 삼키던 저의 눈물은 차라리 눈물이 아니라 핏물이었습니다. 아내와의 정을 생각하면 망인을 따라 가야 하고 천진난만한 어린 것들을 생각하면 더욱 강해져야겠다는 이율배반적 상념속에 번뇌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그러한 소승적 생각에서 떨쳐일어나 좀더 크게 마음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중생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기정사실과 어느 누구든 먼저가고 늦게 가는 시간의 차이뿐. 삼라만상이 찰라지간이며 제행무상임을 절감하면서,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해있는 오늘의 이 현상이 지옥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중생은 모두 화택(火宅)속에 들어앉아 있는 형국이라는 것을. 저는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옥고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불법을 믿고 스스로를 육식(六識)의 굴레에서 벗기는 일이라고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린다면 진심으로 초발심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결국은 죽음이란 절대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제 스스로 정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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