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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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 일면스님
  • 승인 200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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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를 찾아서

도봉산에서 건너다보면 동쪽으로 두 개의 아름다운 산이 바라다 보인다. 그 남쪽편이 태능 뒷산인 불암산이고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 수락산이다. 이 수락산 남쪽 기슭에 흥국사라는 절이 있다. 「덕절」이라고 불리우기도 한 이 절은 599년 (新羅 26대 眞平王21년 己未)에 원광국사(圓光國師)가 개산하고 수락사(水落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광국사는 25세 때에 진(陳)나라 금릉 장엄사에서 출가하여 경(經)·율(律)·논(論)을 연구했고 진평왕 22년에 귀국하여 교화를 널리 폈으며 신라 화랑들의 사상과 이념을 정립하기 위해서 화랑 5계를 만드신 분이다. 1568년(宣祖元年)에 선조가 등극하자 이 절 남쪽에 아버지 덕흥대군(德興大君)의 묘를 쓰고, 이 절을 덕흥대군의 원당사(願堂寺)로 재건하여 사액(寺額)을 흥덕사(興德士)라고 내리었다.

덕흥대군은 중종(中宗)의 제 九자로 그의 아들이 대통을 이어받게 되니 곧 선조대왕(宣祖大王)이다. 선조대왕은 효성이 지극하여 자기 생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리어 묘소하도 능(陵)으로 승격시키고자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흥국사 옆에 모셔진 아버지의 묘소를 생각할 때마다 삼보(三宝)를 잘 외호하는 것만이 부친의 명복과 영생극락을 비는 길이라 믿고 흥국사를 중수하고 복원했던 것이다. 여러 원(院)에서는 흥국사 근방에 사는 나뭇꾼이나 나그네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덕송(德松)에서 왔다고 하면 푸대접을 해서 보내고 덕릉(德陵)에서 왔다고 하면 가지고 온 물건값도 높이 쳐주고 먹는 것도 잘 대접해서 보냈다고 하니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덕릉에서 왔다고 꾸며대서 대접을 받았다고 하니 선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곳을 덕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뒤 1626년(仁祖 4년)에는 왕가로부터 사명(寺名)을 흥국사로 개칭하게 되었고 1790년 (正祖 14년)에 규정소(糾正所)로 책정된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 승니(僧尼)의 기강을 진작하는 일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널리 교세를 떨치게 되었다.

흥국사는 약사(藥師)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인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에게는 한 딸이 있었는데 출가를 해서 금강산 유림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태조가 등극한 뒤 왕자들의 알력으로 마음을 상하게 되어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준 다음 함흥에 오랫동안 내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뒤 서울에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골육상쟁으로 병들어가는 자식들의 우애를 보자 그의 병은 점점 무거워져 갈 뿐이었다. 비구니(比丘尼)가 된 딸이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회복을 빌기 위해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조성하여 정릉에 있는 봉국사에 봉안을 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했다. 그 기도의 효험이었던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병이 점차로 나아지는 듯 했고 이 소문이 나라 안에 퍼지자 각처에서 이 봉국사에 많은 신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봉국사의 사세는 날로 커갔다.

그런데 하루는 이 절에서 약사여래상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스님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혹시 스님들 가운데 누가 부처님께 섭섭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찾아 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얼마 뒤에 약사여래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어서 스님들이 뛰어가 보았더니 정말로 부처님이 냇가에 앉아 계셨다고 한다. 스님들은 다시 모셔갈려고 했지만 약사여래상은 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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