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여라, 더 숙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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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여라, 더 숙여라”
  • 관리자
  • 승인 2009.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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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모 / 금오 스님의 제자 월주 스님
▲ 금오 스님

저녁 7시, 스님이 막 강원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물이 부족해서 고생하는 태백 사람들을 위해 20리터들이 생수 2만여 통을 전해주고 오는 길이란다. 지난해에는 몽골 사람들을 위해 12개의 펌프장을 만들어주었고, 케냐,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에서 ‘생명의 우물 1000’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스님은 지금도 우물을 파고 물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세수 75세, 총무원장직을 떠난 지도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월주 스님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고, 세상을 향해 강처럼 물처럼 부단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불교계 어른으로서 해야 할 소임도 한둘이 아니다. 당장 다음날도 금산사 템플스테이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걸음으로 달려나가야 하니. 부득불 저녁시간에나 잠깐 짬을 내서 객을 맞이한 것이다.

불교정화운동의 주역 _____ “우리 스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고?” 스님은 산사 뒷방에서 재미난 옛날 이야기라도 들려줄 듯이 운을 떼었다. 그러나 정작 스님이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은사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나 금오 스님이 보였던 선객으로서의 면면이 아니었다.

“기자 양반! 우리 스님이 불교정화운동 최초 발의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책을 펴들며 스님은 당신이 기록한 메모장과 책장을 넘기며 불교정화운동이 싹을 틔우던 1950년대로 거침없이 거슬러 올라갔다. 1954년 전국 비구승 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 이후 총무원장, 감찰원장, 그리고 1961년 제6차 세계불교도 대회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 등 월주 스님은 연도는 물론이고 당시 금오 스님이 맡았던 직책까지 정확하게 짚어보이며 당신의 은사를 추억했다.

“물론 스님은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서슬퍼런 선사였죠. 그러니 총무원장, 감찰원장 같은 직책이 당신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죠. 그러나 청정 수행자였기 때문에, 종단을 정화하고 정법승단을 일으켜야 한다는 원력과 사명감이 누구보다 간절했던 것입니다. 스님의 그런 원력이 있어 오늘의 이 승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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