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도시의 해시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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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그늘] 도시의 해시계들
  • 이청준
  • 승인 2009.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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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그늘

여름날 아침에 아파트를 나서다 보면 으레 만나게 되는 정경 한 가지 있었다. 여름철 아침나절, 아파트 건물들은 그늘을 서북쪽으로 내려 깐다. 거기에 아파트의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기가 예사였다. 더러는 손주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어린 장난질을 지키기도 하고, 더러는 그냥 이웃 노인들과 시간 보내기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아니면 그저 멍멍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무료한 시간들만 되삭인다.

그런데 나는 그 앞 길목을 지나다니면서 몇 가지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하나는 그 할머니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이다. 이 할머니들이 날마다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일구- 그늘 더 곁을 지나다가 문득 공연한 호기심에 이끌려 한 마디씩 귀를 기울여 들어 보면, 그것은 대개 두고 온 옛 고향 시절의 살림살이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함께 사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자랑과 흉보기가 영락없었다. 하기야 노인네들 자리에 그런 이야기라니 실상 기이할 것도 말 것도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으로 내가 거기서 알아낸 두 번째 사실은 좀처럼 마음에서 지워지질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노인네들이 그 자신들의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그려 보인 일이었다. 저녁나절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다 보면, 노인들의 자리는 으레 서남쪽 방향으로 옮겨져 있곤 하였다. 아파트의 그늘이 그동안 그쪽으로 휘돌아 옮겨진 때문이다. 노인들은 마치 살아 있는 해시계처럼 하루 종일 그 아파트의 그늘을 따라 자리를 맴돌며 옮겨 다닌 것이다. 그러다 하루해가 아주 기울고 나면 한 사람 한 사람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제각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가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인들은 이상하게 모두 눈빛들이 비슷했다. 무슨 원망이나 한숨기 들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깊은 슬픔이나 오랜 기다림, 아니면 간절한 기구나 때 늦은 소망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함께 스며 얽힌 듯 싶기도 하고, 또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듯 한 그런 눈빛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눈빛! 어쩌면 지나간 모든 인생사 아픈 원망과 분노들마저 이미 말없는 용서로 되삭여 버리고 있는 듯한 하염없고 먼 눈빛들! 그게 내가 거기서 알게 된 세 번째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할머니들의 곁을 지나다니면서 어느새 그 노인들의 눈빛을 마음으로 지녀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그 눈빛에 담겨진 뜻을 묻고 그 말없는 기와 소망들을 캐어 보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끝내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알아내기가 두려웠다. 그 슬픔이나 원망이 무엇인지, 그 기구와 기다림이 무엇인지 나의 섣부른 말들은 오히려 당신들이 살아온 긴긴 세월과 삶의 여정을 헛되고 욕되게 할 뿐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한 내력이나 뜻을 모르는 채 그냥 그렇게 멀고 깊은 눈빛을 함께 마음속에 지니고 싶어 했을 뿐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며칠 전, 연등절(燃燈節) 날 저녁이었다. 그저 구경삼아 가까운 절을 찾은 적이 있었다. 절의 경내는 온통 연등과 촛불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 그 불꽃의 합창과도 같은 약한 인간들의 사무친 기구 가운데서 문득 연전의 그 아파트 동네 노인들의 말 없는 기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의 발길조차 잘 미치지 않는 호젓한 뒷산 기슭, 거기 조그맣게 몇 송이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좋은 자리를 못 얻어 거기까지 쫓겨난 것 같은 외롭고 수줍고 가난한 촛불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촛불들에서 엉뚱하게도 저 아파트 노인들의 사무치게 간절한 기구를 본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 작고 가난한 불빛들일수록 부처님께서는 아마도 그것을 더욱 더 귀한 기구로 앞서 거두어 주실 것이 틀림없으리라, 나의 조그만 기구를 함께 덧붙이고 돌아온 것이다. 비록 아직도 그 노인들의 깊은 기구나 기다림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알지는 모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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