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스러운 심법의 묘용
상태바
신령스러운 심법의 묘용
  • 관리자
  • 승인 2009.05.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의 고전 /종문무고(宗門武庫) ⑮

담당 준 (湛堂 準) 화상은 공명(孔明)의 ⌜출사표(出師表)⌟를 일고 문장을 지을 줄 알게 되었다 한다.

그의 ‘나한에게 공양하는 글[羅漢供疏],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범어인 아라한은 우리말로는 ‘무생(無生)’이라 한다. 삼계 25유(有)의 번뇌를 벗어나고 분단생사(分段生死)¹⁾를 초월하여, “천상과 인간의 공양을 받을 만하니, 모든 중생을 복되고 이롭게 하라”는 부처님의 유촉을 받은 이들이다. 그러니 신자들은 반드시 공양해야 한다. 또, ‘수마기(水魔記)²⁾를 지었는데, 이런 것이다.

늑담산(泐潭山)은 마조대적(馬祖大寂) 선사께서 예전에 선자(禪者)들에게 부처를 뽑던 대도량이다.

비록 햇수는 매우 오래되었으나 불법은 오래된 적이 없다. 다만 그동안 선지식들의 소견이 같지 않아서 서로 높고 낮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된 것이 있다면 있다 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중이 마조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마음이 부처다.”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신 뜻을 살펴보면, 중생이 성불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으니, 그 높고 낮은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법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더욱이 말세에 자신이 얽매여 법을 설하는 자이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를 뽑고 스승을 찾는 일을 부득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송(大宋) 원부(元符) 무인년[1098]에 한중(漢中)의 사문인 의충(義忠)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부처에 뽑히려 선을 참구하여, 간목(干木)³⁾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장소를 만나면 놀이를 했다.

그런데 그 장소는 한때에 놀이를 벌인 것이었지만, 그 공덕은 만고에 이익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전의 제도를 고쳤으나 정인(정人)은 오히려 그 뜻을 몰랐다.

그릇에 따르고 근기에 맞게 하여 그렇게 변통(변통)하는 것은 나에게 있으니, 어찌 먹줄로써 그 큰 법칙에 구애될 것이건대 고인의 규칙에 얽매이겠는가?

이것은 ‘자식에게는 가르칠 만한 것이 없다. 가르치는 것은 언어의 찌꺼기일 뿐이요, 마음의 지극히 미묘한 것은 아니다. 그 지극히 미묘한 마음은 나에게 있고 문자나 언어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비록 훌륭한 스승이 비밀리 법을 전해주더라도 마음으로 스스로 얻은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얻고 손에 쥐는 것이 모두 신령스런 심법(心法)의 묘용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보리를 빻을 적에는 절구를 쓰고, 쌀을 찧고자 하면 맷돌을 쓰며, 밀가루를 얻고자 하면 체를 쓰며, 겨를 버리고자 하면 풍구를 쓴다. 하지만 본보기인 법은 모두 빗장이 있어서 소식이 이미 통달되면 어떤 경우에도 펴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 간다. 마치 물이 한 물결이 일어나면 앞 물결과 뒷 물결이 물결과 물결이 서로 맞받아 끝이 없고, 맷돌이 한 바퀴가 굴러가면 큰 바퀴 작은 바퀴가 바퀴와 바퀴가 굴러 무궁한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위 아래가 서로 맞받고 높고 낮은 것이 함께 작용하니, 그 묘용이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기묘하기가 볼 만하여, 현묘하고 또 현묘한 연후에 이리저리 선회하고 마음대로 가고 와서 서로 맞부딛치면 큰 법음(법음)을 내어서, 언제나 고(苦 ) ․ 공(空) ․ 무상(無常) ․ 무아(無我)의 여러 바라밀을 연설하여, 듣는 자는 그 마음을 듣고 보는 자는 그 성품을 보며, 내지 냄새 맡고, 맛보고, 알고, 감각함에 모두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얻을 것이니, 또한 어찌 쌀이나 국수 등의 음식으로 선불장(選佛場)에 왕래하는 선자(禪者)들을 배부르게 할 것이랴.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