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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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집
  • 류시화
  • 승인 2009.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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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나는 그 집엘 가보곤 했었다. 아마 열 서너살 쯤 되었을까. 내가 최초로 빛의 무서움을 알고 다가오는 저녁나절의 막막한 불안을 이미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저마다에게 찾아오는 그러한 시기가 나에게는 조금 일찍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그 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 집은 나에게는 이를테면 나비가 통과해야만 하는 시간의 둥근 벌레집 이었다고나 할까. 그토록 어린 나이에 어떤 계시의 순간이 나에게 닥쳐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마치 무엇엔가 현혹된 것처럼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눈 앞에 나타나는 그 이층집을 발견하곤 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그 집엘 들어갔었다.

굳이 그 이층집에 대한 묘사를 할 필요는 없다. 장미라든가 우거진 넝쿨, 목조의 현관같은 것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은 나나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마음먹기만 하면 머리 속에서 언제나 지을 수 있는 멋진 집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장식물이 그 이층집에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설혹 비밀스런 꽃들이나 창문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해도 나는 차마 말할 수 없다.

내가 본 꽃들은 이미 이 세상의 꽃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잎사귀와 줄기, 향기는 같아도 그 꽃들은 이미 같은 종류의 꽃들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것들과 같은 이름, 같은 형태를 갖고 있다해도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곳에서 장미를 보았다고, 그 집에는 장미가 피어 있었다고 말을 해도 그것은 환상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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