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촬요연의] 참선경어(參禪警語)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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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촬요연의] 참선경어(參禪警語) (1)
  • 석주 스님
  • 승인 2009.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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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촬요연의

  참선자를 깨우치고 참선하는데 잘못 들어가는 병폐를 낱낱이 지적하고 바로 잡아주어 참선공부를 지어 가는데 있어 진로를 밝게 보인 것이 곧 참선경어다. 골수에 파고드는 병통을 잡아서 그 모두를 드러내는 것이 여기에 있다.

 1. 머릿말

  「참선경어」는 중국 명나라 만력(萬曆)년간, 즉 우리나라 이조 선조, 광해군 대에 재세하시던 박산무이선사(博山無異禪師)가 지은 것이다.

  중국의 선은 당, 송시대를 전성시기로 하고 명나라 때에 들어오면서 점점 쇠퇴하여 떨치지 못하였다. 특히 그 말엽에 이르러서는 선의 골격을 의심하리만치 여러가지 잡된 생각이 섞여 가히 병폐가 백출하였고, 점점 쇠미해졌다. 그래서 참선 학도자들은 그 나아갈 길을 모르고 헤매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지금의 중국 강서성에 머물러 계시던 무이 선사가 당시의 선학자들을 연민히 보고 분연히 지은 것이 참선경어다. 제목이 말하듯이 참선자를 깨우치고 참선하는데 잘못 들어가는 병폐를 낱낱이 지적하고 바로 잡아주어 참선공부를 지어 가는데 있어 진로를 밝게 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경어」는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에 들어 깨우칠 줄 모르고 졸고 있는 것을 놀라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훌륭한 약이 되는 것이며 저때에 참선공부를 잘못하는 병폐를 고치는 데도 또한 요약이 됨은 틀림 없는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잘못하는 참선을 일깨워주고 진취가 없는 참선을 격발하고 삐뚤어진 공부법을 바로 잡아주는 결정적 편책이 되는 만고의 영문(靈文)이라 하겠다.

  2. 「참선경어」의 내용

「참선경어」의 내용에 대하여는 뒤에 보이는 바 유숭경(劉崇慶)이 지은 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는 않겠다. 대체적인 골격만을 말하면 다섯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째가 처음 참선하는 사람을 위한 경어이고, 다음이 옛 도인의 말씀과 이에 대한 요점을 다시 평한 경어이고, 세 번째는 참선하는 데 있어 의정(疑情)이 발하지 아니할 때에 대한 경어이며, 네 번째는 이미 의정이 발한 때에 공부길을 이른 경어이고, 끝으로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를 들고 지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몇몇 참선인에게 이른 경어를 수록한다. 좀 더 내용적으로 말하면 「참선경어」는 참선을 하는 데에 요긴한 것을 모두 말하고 이를 증거하는 옛 성인의 체험과 말씀을 수록하고, 그 사이 사이에 박산화상이 친히 평론을 더해서 철저하게 참선 공부를 지어가는 방법을 말씀하며 바른 공부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박산무이 선사(博山無異禪師)에 대하여

  박산 선사는 이름이 원래(元來)다. 그러나 학자간에 널리 알려지기로는 무이 선사로 통하고 있다. 속성은 사(沙) 씨, 중국 명나라 만력 3년(서기 1575년)에 탄생하였다. 16세에 출가의 뜻을 가지고 지금의 남경에 있던 와관사(瓦官寺)에 이르렀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법화경을 강의하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법화경 강의를 듣고서 생각하기를 『부처님 법은 생각으로 분별해서 알 바가 아니라 하셨는데 경을 배워서 무엇하랴』하고는 뛰쳐나왔다.

  지금의 산서성 오대산에 계시던 정암통(靜庵通) 화상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통화상은 처음 공관(空觀)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곳에서 5년을 지내고 제방으로 다니며 제방 선지식을 찾아 연마하고, 드디어 인종(印宗) 선사의 인가를 받았다. 28세가 되는 만력 30년에 지금의 강서성 박산에 들어가 지내기를 3년, 드디어 박산에 있는 능인사(能仁寺)(박산사라고도 한다)에 이르러 이곳에서 교화하여 오늘의 박산 스님의 이름을 얻게 된다. 그 후 민중(中)에 있는 훈암사(薰巖寺)에서 무명(無明) 장로와 함께 자리를 나누어 설법하게 되니 이때에 박산 선사의 종풍은 천하에 떨치고 문하에 참선학도가 항상 8백 명이 되었다고 한다. 선사는 박산사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불자를 휘두르니 제방에서 학도자는 운집하고 그 제자는 만으로 헤아렸다고도 한다. 숭정 3년(서기 1630년) 9월 18일 입적하였다. 승납은 41, 세수 56세다. 입적을 당하여 문도가 송을 청하는 붓을 들고 「역역분명(歷歷分明)」의 넉자를 쓰고 붓을 던지고 시적하였다.

  청 태조가 입국을 선언한 것이 선사 41세이고 명이 청에게 망한 것은 서기 1661년이니 선사 입적하신 후 31년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사가 명조 말엽에 종승을 굳게 세워 중국 청대에 법의 기반을 제공한 선사의 위치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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