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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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밤
  • 관리자
  • 승인 2009.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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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그늘

 며칠간 쾌적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근무처 이동으로 인한 몇달 동안의 긴장과 피곤을 잠시나마 씻어볼 요량으로 모처럼 책상앞에 앉았다. 마침 열어둔 창문 위로 언뜻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덩그란 달덩이가 벙글거리고 있다. 나는 순간 나이도 잊고 벌떡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간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이 온통 가슴속 전부를 흔들어 놓는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무구한 달빛을 바라보며 조금도 잡티 묻지 않은 정결한 마음이 되어 보는 것이...

 개구장이 어린 시절 이렇게 달밝은 밤이면 마을앞 빈터에서 우리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망나니들 처럼 몰려들어서 동네가 떠나가라고 떠들어대곤 했었다. 애틋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가득히 고여 옴을 느낀다.

 그런 아주 어린 시절의 추억 말고도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달밤이 있었음을 문득 생각하고 창틀을 붙들고 있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며 눈을 질끈 감는다.

 감은 눈시울 안으로 하얗게 빛나는 달빛을 쪼개며 수 천, 수 만 조각으로 여울지는 바다가 보인다. 방파제가 보인다. 방파제에 군데군데 쌓여있던 모래무더기들이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그래도 부모님 덕분에 M시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그러나 K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들 탓으로 남의집 가정교사 노릇을 해야만 했다.먼 친척뻘이 된다고 했지만, 촌수를 꼽고 어쩌고 할 게재도 못되었다.

 다행인 것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둔재들은 아니어서, 그의 부모들에게 K를 낭패시키는 일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덕택에 비교적 그집에서의 K의 공간은 최소한이나마 확보되고, 시간의 융통도 허락되었었다. 저녁만 먹으면 나는 K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하숙하던 장군동에서 남산동까지는 꽤 먼 길이었으나 하룻저녁이라도 만나지 않고는 못배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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