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사상의 하부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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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사상의 하부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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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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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원효의 화쟁사상과 민족통일

<위>로의 삶과 <아래>로의 삶

스스로의 깨달음을 위해서 진리를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위>로의 삶’이라 하고 이웃들의 깨달음을 위하여 진리의 세계로부터 땀내나는 중생들을 향하여 나오는 삶을 ‘<아래>로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범부(凡夫)들은 이 중의 어느 편향된 방식만을 택하여 추구해 가기 마련이다. 불교의 이상(理想)은 그 어느 한쪽만일 수가 없다. 이들은 곧 한 인간의 삶 속에서 동시에 추구되어야 할 동일 차원의 변이형태인 것이며, 이를 아울러 추구해 가는 구도자를 일컬어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함은 주지하는 바이다.

원효(元曉)의 삶에서는 이 <위>로의 삶과 <아래>로의 삶을 동시에 추구한 가장 원만한 한 예를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해 가며 깨친 진리의 세계를 어렵고도 체계적인 방대한 저술을 통하여 유포시키고자 했다는 면에서 <위>로의 삶을 추구했다. 또한 동시에, 왕권(王權)이나 귀족들과 밀착된 상류계급 중심의 당시 불교를 땔나무하고 물긷는 시골아이들이나 지게꾼에게까지 넓히고자 하는 <아래>로의 삶을 함께 추구했던 것이다.

원효는 진평왕(眞平王) 39년(617년)에 태어나서 신문왕(神文王) 6년(686년)에 입적했다. 속성(俗姓)은 설(薛)이니, 신분상으로는 육두품(六頭品)이며 아버지는 담나(談奈) 내말(乃末),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다. 그가 어떻게 보리심을 발하여 출가했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두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철저한 골품제사회였던 신라에서 여러 가지 신분적 한계에 부딪혀야 했던 육두품 출신들은, 주로 재야 지식인으로 혹은 종교계로 진출함으로써 스스로 그 한계를 초극하고자 했던 많은 사례에 비추어, 그에게 있어서도 역시 사회적 신분의 한계가 출가의 한 원인 혹은 동기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다음은, 진흥왕대에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완성한 신라사회에 당시까지만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불교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이 점을 인식한 그는 스스로가 최초로 불교의 광채를 찬란히 빛내고자 하는 원력을 세움으로써 불문(佛門)에 들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이는 그가 탄생한 마을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생가를 절로 만들어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자신의 이름을 새벽이라는 의미인 원효(元曉)라고 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뒷받침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선지식들이 그러하듯이 그에게도 정해진 스승은 따로이 없었다. 오직 진리를 따를 뿐이었다. 그런 만큼 오히려 어느 누구든지 스승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린 마음이 사상의 폭을 넓히고 경 ∙ 율 ∙ 논 삼장에 두루 통달케 했으며, 그로 하여금 어느 한 스승이나 종파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고 다양한 논쟁이나 주장들을 화해(和解)시킬 수 있게 한 정신적 배경이리라.

널리 스승을 구하는 그의 노력은 다양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전해져 온다. 고구려의 고승이었던 보덕(普德)에게서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우고(대각국사문집 권16), 현장(玄奘) 법사를 흠모하여 입당(入唐)을 꾀하기도 하며(송고승전), 여러 경의 소(疏)를 지을 때마다 혜공(惠空)에게 묻기도 하고(삼국유사), 낭지(朗智)의 명에 따라 ≪초장관문(初章觀文)≫이나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어서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삼국유사).

한편 <아래>로의 삶이라는 측면과도 관련해서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부단히 자기한계를 극복해 가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민중들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인(異人, 불보살의 화신)들의 깨우침으로 인해서 그 전기(轉機)가 마련된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그 예를 보기로 하자.

나이 열두 살 되도록 일어나지도, 말도 못하여 장애자라고 생각되었던 사복(蛇福)이 어머니가 죽자 시다림 법문을 원효에게 청한다. 그러자 원효는 “태어나지 말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라고 했다. 이에 사복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고 되받으면서 그의 말이 너무 번거로움을 책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인가 분별하여 어렵게 말하려 했던 것인데 사복으로부터 깨우침을 받은 것이다.

다음은 관세음보살을 참배하러 낙산사로 갈 때의 일이다. 어느 다리 아래서 빨래하는 한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그에게 여인은 개짐 빨던 그 물을 떠준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더러운 물이라 하여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 마시는데, 마침 옆 소나무의 파랑새가 “제호(醍醐)스님은 관두시오”라며, 그때까지만 해도 더러움과 깨끗함의 이원적 분별에 떨어져 있던 그를 깨우치는데 나중에야 여인과 파랑새가 관음보살의 화현임을 깨닫는다.

실로 원효의 깨달음은 그의 오도(悟道) 인연실화가 암시하듯이 청정과 부정, 마음(心)과 사물(法)의 ‘둘 아님(不二)’을 체득하는 것이었다. 중생과 부처, 청정과 부정이 둘이 아니라는 깨침은 <아래>로의 삶을 통해 중생들로 하여금 중생들 속에서 부처를 발견하게 하고, 부정한 것 속에 있는 청정을 보도록 천촌만락(千村萬落)을 행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이처럼 그의 삶은 <위>로의 삶과 <아래>로의 삶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열린 마음의 무애행을 했으니, 비로소 우리 불교의 첫 모습(初開)으로서 후대 불교의 이상형(理想型, ideal type)을 정립시켰던 것이다.

‘하나’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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