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의 이쟁을 회통하여 통불교적 사상을 체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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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의 이쟁을 회통하여 통불교적 사상을 체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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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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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원효의 화쟁사상과 민족통일

원효의 생애

원효는 26대 진평왕 39년(A.D.617)에 납량군(현 경산군 자인)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화랑의 신분으로 만인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고매한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일찍이 출가하여 흥륜법장(興輪法藏) 문하에 출가하였다. 그리하여 영취산의 반고사(磻高寺) 동쪽에 있는 랑지(朗智)법사에게 법화경을 배우고「초장관문(初章觀門)」과「안심사심론(安心事心論)」을 지었으며,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의 보덕(普德)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웠다. 그러나 그가 어느 논(論)이나 일종(一宗)에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연의 ‘학(學)이 어느 스승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나 송 고승전에 ‘흐르는 물처럼 어디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보다 대도를 구하기 위하여 당 고종의 영미(永微) 원년 경술(661, 원효의 나이 45세 때) 당토(唐土)교종의 성대함을 듣고 당에 유학하기 위해서 의상대사와 당주계(唐州界)를 지나 구도의 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도중 밤에 무덤가에서 머문 것이 기연이 되어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의 진리를 깨닫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 다시는 신라 밖을 나가 본 일이 없이 신라의 중생제도에 매진했던 것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님과 중생도 없는 것이다. 극락과 지옥도 이 일심상에서 조작된다. 이 일심은 언어와 분별을 떠나며 본래 청정한 우주체이다. 이것이 만법일여(萬法一如)의 실상이며, 이것이 곧 정지(正智)이다. 이 정지로 우주만유가 본래 평등일여한 실상을 간파하고 실상이 또 여러 인연인과(因緣因果)의 법칙을 차별해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실상이 현상이요, 평등이 곧 차별로서 공이 곧 유이며 진이 곧 속인 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원효의 이와 같은 깨달음은 부처님이나 조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깨달은 지혜와 실체의 행동이 반드시 일치되지 않음을 자각했기 때문에 다시 성도(聖道)의 수행에 나선 것이다. 그는 소성(小姓)거사라 자칭하고 무애박을 두들기면서 무애노래를 부르고 무애춤을 추면서 방방곡곡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였다. 그러므로 움막 속의 거지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불법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형식이나 틀이 없었고, 확실하게 툭 터진 일심의 마음, 일심사상으로 귀원시키고 있다.

유무가 둘일 수 없고 중생과 불(佛)이 둘일 수 없으며 소승과 대승이 둘일 수 없다. 반야의 공은 공이면서 완공(完空)이 아니요, 유식(唯識)의 유는 유이면서 완유(完有)가 아닌 가유(假有)인 것이다. 그리하여 공과 유는 둘이 아닌 상즉불이(相卽不二)로서 결국 일심사상으로 귀일시키고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은 원효가 인도나 중국에서 대승, 소승, 공(空), 성(性), 상(相)의 모든 부파가 자기의 이론만을 내세우고 타의 것을 비판하여 비담(毘曇), 성실(成實), 반야, 지론(智論), 섭론(攝論), 삼론(三論), 열반, 법상(法相), 화엄 등 종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교계가 혼란한 것을 보고 원효는 제종정립을 일대사 인연으로 생각하여 앞서의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즉 백천경론의 지사(旨師)와 백가의 이쟁(異諍)이 총결하여 일심의 불법과 일미의 불법에서 일어남을 통찰하여 회통의 통불교적 사상을 체계화한 것이다.

일심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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