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대왕신종에 감자꽃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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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에 감자꽃 피고
  • 관리자
  • 승인 2008.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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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떠나는 산사여행 / 내 마음의 산문(山門), 경주 남산 칠불암
▲ 경주 반월성과 첨성대 사이에 있는 끝물의 유채밭에서 관광객들이 벌서 가버리는 봄을 아쉬워하듯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있다.

길에도 층위가 있다. 한적한 들길이나 수목원 길처럼 침묵의 맨발로 조용히 횡단하고 싶은 사유의 길이 있는가 하면, 온갖 소음이 들끓는 도시의 역전 길이나 주점가 뒷골목 길처럼 열려 있는 마음마저 재빨리 닫고 후다닥 저어가 버리고 싶은 불온한 길도 있다.

길의 층위엔 또 속도라는 생산성의 가면으로 치장된 질주의 길도 있다. 고속도로가 그렇고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잘 포장된 자동차 전용도로가 그렇다. 그런 길은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성을 배제한 채 오로지 시간과 속도라는 두 가지 물신적 목적 달성만을 위해 본래 길이 가지고 있는 사유와 걷기의 본질을 몰가치적으로 전환해버린 인위의 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과 속도는 길의 생산성이 아니다. 길의 생산성은 오히려 길 가는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온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20km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는 사람의 내면에 삶의 어떤 생산성이 고여 들 수 있겠는가? 그의 삶엔 다만 기계적 속도와 빨리빨리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길의 층위는 침묵의 사유로 구별된다. 길을 가는 동안 사람의 내면에 고여 드는 침묵의 사유와 세상과 소통하는 인식과 지각의 귀에 의해 길은 길로서 자연적 생명력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다비드 르 브르통의 말처럼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길은 비로소 길 가는 사람을 바로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예부터 길 가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불렀다. 붓다와 예수처럼 깨우친 사람이라 불렀다. 그리고 아직 그 깨우침의 층위엔 미달했지만, 길 위에서 침묵과 사유의 언어로 조금이라도 세상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을 나그네라 불렀다. 바람처럼 세상을 흐르며 우주의 소리를 음미하고 즐길 줄 아는 풍류객이라고 불렀다.

그런 마음으로 산사 여행을 떠난 지 5개월, 아직은 그런 품격을 따라잡기엔 머나먼 길손이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런 층위의 마음으로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의 여로에 섰다.

【 경주 남산, 야단법석의 노천 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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