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사명선사의 호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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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사명선사의 호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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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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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 호국불교

나라를 사랑하고 종묘사직을 근심함은 산승 또한 하나의 신하이기 때문이다

1.

서산대사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과 사명대사 송운 유정(松雲 惟政: 1544~1610)이 충군 애족의 우국 고승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알이다. 그러나 그 두분 대사의 호국사상을 알만한 자료를 오늘날 볼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의 우국 애족적인 행적과 극히 희소하나마 몇편의 글을 통하여 그 국가관의 윤곽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들의 호국관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두 대사의 국가에 대한 정신적인 자세(말하자면 국가관이이나 사상)에 관한 면을 주로해서 그 대충을 살펴보고자 한다. 서산대사 제자인 사명당은 갑오년 9월에 서울로 가서 상소한 글【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蔬)】에 스스로를 「어버이도 없고 나랏님도 없는 죄인」이라고 하였다.

당시 숭유(崇孺)의 사회에 있어서 승려들은 부모와 가정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속세와는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어버이도 임금도 없는 백성이라고들 하였으므로, 승려인 사명당도 자신을 낮추어서 그렇게 표현하였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와 같이 부모 【가정 】도 없고 니라 【君王】도 없이 국가 사회의 테두리 밖에서 살아야했던 존재이면서도 그들 승려들은, 나라의 운명이 우ㅏ태로운 큰 난리를 만나면 깊숙한 산사에서 뛰쳐나와 구국제민의 맨 앞장을 서서 싸웠다. 그러한「無父無君의 」 승려 몸으로 국난을 구하는데 앞장을 서서 모든 승려들을 총궐기시키고 그들을 지휘하였던 장본인이 바로 서산대사 그였고 직접 싸움터에 나가서 외적을 무찌른 의승군의 도대장이 바로 사명당이었다. 그들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고 중생구제에 근본 뜻을 두고 있는 불교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의적도 다 같은 중생이기 때문에 그 목숨을 마구 죽이는 싸움에 승려들이 직접 가담한다는 그 자체는 중생제도라는 불자 본연의 자세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라 본다. 다만 나라의 평화를 깨뜨리고 죄없는 백성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악의 무리를 내쫓기 위한 정의의 칼을 높이 들었던 것이요, 종묘사직의 위난을 구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앞장을 섰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비롯한 많은 의승들이 왜적과 싸웠던 것은 파사현정(破邪顯正)과 중생구제도 물론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보다도 순수한 국민의 도리를 다한 우국 애족의 숭고한 정신의 발로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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