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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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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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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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을 찾아서

 (1)호국종찰(護國宗刹)

한 산에 절이 들어 앉는 데는 그만한 연유와 사건이 있다. 비록 작은 암자라도 그렇다. 그

런데 우리나라 절 가운데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 종찰로서 국가적 발원에 의하여 창

건된 절은 드물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가 바로 이런 호국 발원의 역사적 종찰인 것이다.

신라가 사방의 압력을 견디어 가면서 융성한 국가적 기반을 형성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차

곡차곡 쌓아가던 문무왕一九년(서기六七二년)신라는 비단 고구려나 백제의 압력 뿐만 아니

라 바다 건너에서 몰려 오는 왜구에 의해서 심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무렵 왜구는 우

리나라 연안 뿐 아니라 백제 고구려 해변 까지도 노략질을 쉬지않고 있었다. 그해도 동해안

에 왜구가 대거 침공해 왔다. 신라의 해군력으로는 막기 어려웠고, 적은 해안지대를 근거하

여 포악한 노략질을 쉬지 않았다 근심에 쌓인 문무왕은 부처님께 기도를 쉬지 않더니 한번

은 꿈에 서몽을 얻었다 그것은 「신라 동남 간에 금정산이 있으니 그 산위에는 바위가 있고

사철 물이 고여 있어서 범천의 고기가 내려와 노는 상서로운 곳이다. 태백산에 머물고 있는

의상대사를 청하여 기도를 하면 필시 국난을 면할 것이다. 」하는 신인의 현몽이었다. 문무

왕은 즉시 의상조사를 청하여 금정산에 이르게 하여 이곳에서 화엄경 신중편을 독송하니 불

시에 천병이 나타나 바닷가에 진치고 있는 왜구들을 덮쳤다. 돌발적인 폭풍과 함께 번개처

럼 밀어닥친 천병앞에 왜구는 혼비백산하여 모두를 버리고 근근히 목숨을 부지하여 물러갔

다. 신라 조야의 기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잇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는

문무왕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고 의상조사에 대한 숭앙심도 깊어졌다, 원래 의상조사는 당

에 유학중에도 불교의 깊은 진리를 온전히 전해 받아 신라에 가져 왔을 뿐 아니라 신라를

치고자 하는 당의 음모를 알게 되자 급거 귀국, 이에 대치케 하는 등 애국적 정열은 대단

했다. 문무왕이 국가의 안녕과 국운의 융창을 기원하는 근본도량으로 범어사를 짓게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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