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버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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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버릴 것인가?
  • 관리자
  • 승인 2008.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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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구도문답

  1.사랑을 버릴 것인가?

문ㅡ(智用) 사람은 애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것을 버렸을 때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답 ㅡ 경에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이 은애와 탐욕으로 말미암아 윤회가 있게 되고 모든 중생이 음욕으로 인하여 그 목숨을 정하나니 따라서 윤회는 사람이 근본이 된다 」히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중생에 있어 사랑은 그 목숨의 근본과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을 알겠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어떻게 써야 바른 것인지 사랑의 근본이 어떤 것인지를 밝힌 연후에야 사랑을 버리고 혹은 안버리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이것이 욕망과 결합하여 자기 세계를 형성합니다. 그욕망은 협소한 작은 것에 탐착할수록 자기가 적은 것으로 전락하고 큰 것은 욕망하여 그것을 사랑으로 충만할수록 가치는 확대되고 기쁨도 보람도 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망이나 사랑이 나쁜 것이 아니고 대상을 작은 것으로 구하고 그것에 탐착할수록 저열 저질의 시랑이 될 것이며 욕망의 대상을 한 사회라던가 국가라던가 공익이라던가 하는 등으로 넓게 구하고 거기에 사랑이 확충될수록 값있고 성스러운 사랑으로 빛을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이나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선택하고 발휘하는 지견과 지혜에 따라 차별이 벌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원래 욕망은 대상을 선택한 것이고 사랑은 그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나타내는 힙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탐이며 탐은 진리의 직접표현인 힘이라 하겠습니다. 진리가 만법과 둘이 아님을 이루는 힘이 탐이니 말을 바꾸면 탐은 진리의 동력이라 할 것입니다. 순수한 입장에서 관찰하면 탐은 선악을 초월하여 있으며 일체를 성취시키는 힘이라 할 것이므로 이는 허무라기보다 오히려 거룩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탐애를 죄악시하는 것은 탐애의 근본인 진리본연대로 그 탐을 쓰지 아니하고 일신이나 일가족이나 일당을 위하는 식으로 협소하고 편벽지게 쓰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전체와 조화를 깨뜨리고 부조화와 혼란을 야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탐의 표현이며 탐애는 법성진리의 동력이므로 탐애를 넓고 크고 높은 차원에 두고 【원대하고 고매한 욕망 】 생을 펴나갈 때 거기에는 성자의 출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고에 악명 높은 도척은 자기 일신을 중심삼아 탐애를 부린 것이요 국민경제를 혼란시키는 독점기업의 횡포는 자기사업에 탐애의 중심을 둔 것이요 충무공이나 안중근의사는 조국에 탐애의 중심을 둔 것이요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예수는 인류를 일신으로 삼는 욕망에 산사람이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온 법계 일체중생을 자신으로 삼는 법 본분을 중심하여 탐의 힘을 발휘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죄가 아니라 협소하고 편벽하게 욕망하고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밝은 눈, 평등한 지혜로 큰 사랑을 펼쳐 갈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무런 욕망도 없고 의욕도 없다는 것은 자기생면 본분에 대한 반역입니다. 부처님의 무연대비를 배우고 차별없는 대자비를 닦는다는 것은 이것이 법성 본연의 사랑을 쓰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애욕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육체적인 개아나 자기 일가족 중심으로 욕망을 일으키기쉬운 범부의 타성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지 욕망을 없애라는 뜻은 아닙니다. 애욕은 육체적 애착을 의미 하는 것으로 협의로만 본다 하더라도 그 도리는 매한가지입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분별하고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등 속에 차별을, 차별속에 집착이 없는 사랑이란 이것이 허물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금강경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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