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논단] 과학철학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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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논단] 과학철학과 종교
  • 김용정
  • 승인 2008.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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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종교와 과학이 반목적이고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있는  오늘에 와서는 과학과 종교는 어느 의미에 있어서는 서로 상통하고 조화를 이루는 면을 엿볼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세기적인 물리학자 파울리는 일찌기 어떤 편지에서 <신학자,거기에서 나는 사이 나쁜 형제의 원형적 관계를 본다.> 고 고백한 일이 있다. 과학의 합리적 이해와 종교의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과학과 종교의 어느 쪽도 합리적인 면과 신비적인 면을 동시에 갖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상보적인 것이다.

지구의 타원 궤도 운동과 태양계설을 발견한 케플러는 그의 <우주론적 신비>에서 < 삼위 일체의 신의 모상은 구다. 즉 아버지의 상은 중심에, 아들의 상은 표면에, 그리고 성령의 상은 중심점과 중간역 내지 주위와의 사이의 모든 영역에 있다.>고 기술 한 바 있다. 케플러에 있어서 중심(아버지)으로부터 표면(아들)으로 향하는 운동은 창조의 상징을 표현하는 것이다.

심층 심리학자 융은 이러한 심볼(상징)을 인도의 산스크리트 말로 <만달라>라고 불렀다. 전술한 파울러는 케플러의 심볼은 현대의 자연과학이 성립하기 까지의 마음의 자세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마음은 특수한 표현 양식으로 내부의 중심으로부터외부에로 향하여 마치 자동적인 것과 같은 전제에 따라서 물질계로 움직인다.>고 보는 거다.따라서 <정신은 그의 이념에 의하여 물질계를 고요히 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의 통일적 기반은 어떤 하나늬 원상 속에서 포착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케플러와 동시대 사람인 영국의 의학자 후릇트는 연금술 철학을 통하여 정신주의의 편향성에 대항하여 자연의 물질계를 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즉 그는 <물질 속에는 구제를 기다리는 정신이 살고 있다. 실험관 속의 실제적인 혹은 추측적인 화학적 경과와 신비적으로 동일화되어 같은 언어로 진술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언제나 자연의 경과 속에 짜여 들어 간다>고 하였다.

이 말의 전반부는 <모든 존재들이 거룩한 희생을 기다리고 있다.>는 베단다 경전의 말과 흡사하며, 후반부는 고빈다(인도 철학자)가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를 동일한 직물의 양면이라고 보려는 사사와 일맥 상통한다.우리가 어떤 솥에 일정량의 쌀과 일정량의 물을 넣어 불 위에 올려놓고 열을 가하면 밥이 지어질 것이라는 추측하에 그대로 실험하여 밥을 얻게 되었을때, 그 밥이 지어지기 까지는 정신과 물질이 서로 협력하여 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렇게 저렇게 하면 밥이 될 것이라는 마음의 상상이 쌀과 물과 솥과 불등의 물질에 작용하여 밥이라는 새로운 물질을 생산하게 된다. 이와같이 자연의 어떤 기존 물질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러저러한 것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나 상상을 보다 체계있게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이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기 때문에 과학에서는 실험이나 실습이나 연습과 훈련, 그리고 체험과 실천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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