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40년 전의 마하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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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40년 전의 마하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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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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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轉轍을 밟지 말기를

① 四十年前의 금강산「마하연」

   나의 선방 첫 철은 금강산「마하연」이다. 기묘년 여름철이니까 지금부터 약 四十년이 되는가 한다. 그때 결제 대중은 七十명으로 기억한다. 청담스님이 입승이었고 정말 발심납자만이 운집해 있었다. 기억나는대로, 지금 해인총림의 방장이신 성철(性徹)스님도 있었고, 서울 삼성암의 본공(本空)스님, 얼마전에 입적하신 성호(嚴性昊)스님, 지원(志圓)스님, 해인사 주지로 계시던 지월(指月)스님, 모두가 쟁쟁한 용상(龍象)들이었다. 조실스님은 정화 때 종정이시던 설석우(薛石友)스님이었고 주지를 겸하셨다.

 밥먹고 살아가는 생활이 오직 참선 하나에 묶여진 생활이어서 세때 공양이 끝나면 양치하고 선방에 돌아앉기가 바빴다. 거의 모두가 그러했다. 입방선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였는데 모두가 공부에 열을 내는 바람에 선방에는 항상 고요한 가운데 더운 열기가 넘쳐 있었다. 꼭 정해논 것은 없었어도 많은 수효가 잠자는 시간도 버리고 참선하고 있었으니 밤에는 일부는 자고 일부는 앉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조실스님의 상당설법은 결제와 해제 때 뿐이었고 혹 의심이 있는 사람은 도반에게 묻거나 영원암에 머무시던 조실스님께 찾아갔었다. 선방 살림살이는 감사인 우봉(愚鳳)스님이 맡아 했다. 그때의 신도들의 정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대중이 七十명인데 매일 각지에서 대중공양이 모여들었다. 주로 서울 신도로 기억한다. 그때의 선방의 외호역활을 하여 큰 화주몫을 단단히 하신 분은 고인이 된 초원허(崔圓虛)스님과 지금 서울 간동교당에 계신 박대륜(朴大輪)노사다. 이 스님들은 많은 외호활동을 하셨던 것이다. 선방이 바로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곳이라는 신앙은 신도들간에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서로 다루어 외호하고 공양하려고 하였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찌 스님들의 정진이 소홀할 수 있었겠는가. 정말 발심납자들만 모인 성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대중 속에는 처사님도 七 · 八인 있었는데 각지에서 모여든 발심한 불자였다.

 

 

   ② 아름답던 家風

   나는 그해 봄에 통도사를 떠나 낙산사 신흥사를 거쳐 「마하연」을 찾아갔던 것이다. 금강산에는 처음에 신계사에 들렸는데 그때는 전 종정이신 효봉(曉峰봉)스님이 보광암토굴에서 나와 여여원(如如院)에 계실때였다. 효봉스님이 용맹정진 하신 그때의 이야기는 당시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었다. 신계사에서 나와 비로봉을 넘어 구룡폭포를 거쳐 「마하연」에 이르렀는데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때의 스님들의 친절과 따뜻한 인정이다. 내가 신계사에 간것은 일행이 셋이었고 게다가 저물어서 당도하였다. 그때의 스님들이 어떻게 고맙게 반겨주시고 대접을 잘하여 주시는지 바람처럼 구름처럼 빈 몸으로 떠다니던 그때의 마음에 사뭇 오래 새겨져 있다. 신계사 뿐만 아니라 금강산 산중이 다 그랬었다. 「마하연」으로 떠나던 날은 점심도시락을 싸주었는데 정말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구룡폭포가에서 먹을 때의 고마운 심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공부인을 반기는 아름다운 풍속을 금강산만은 아니었고 어디가나 도반지정을 뭉클 느끼게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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