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인물전] 백곡(白谷) 처능대사(處能大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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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인물전] 백곡(白谷) 처능대사(處能大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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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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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인물전

 1.詩文에 능한 젊은 스님      

 열 여덟쯤 된 한 사미스님이 속리산의 깊은 골을 벗어나서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눈에 띄는 산천의 경치와 길가의 풍물들을 시로 중얼 중얼 읊으면서 그는 서울에 이르렀다. 당시 이 나라의 사정은 승려가 서울의 성안을 자유로이 다닐 수도 없었거니와 성안에 들어가 머무를 곳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까운 곳이면서도 성안의 명사묵객(名士墨客)들이 자주 왕래하며 시회(詩會)하는 절을 찾아서 우선 자리를 잡았다.

 이 사미의 법명은 처능(處能)이며 자(字)를 신수(愼守)라 하였고 나중에 스스로 백곡(白谷)이라고 호하였다. 그의 나이와 속성과 고향과 출가사찰과 득도 은사(得度 恩師)등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현존하는 行將傳記가 없으므로)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이때 이미 한학에 능하였고 시문의 재주가 뛰어났었다.

 그래서 그는 시문을 더 익히고자 산사의 생활을 떠나 명공학사(名公學士)와 문장재사들이 많다는 서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이름있는 서인 문사들과 알게되었고 또 그들로부터 칭찬과 아낌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재주와 이름이 성안의 명사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가고 있을 무렵에 그는 당대에 글과 글씨와 그리고 인품으로서 높이 존경을 받고 있던 동회거사(東淮居士) 신익성(申翊聖)의 문하로 들어갔다.

 신익성 (1588~1644)은 자가 군석(君奭))이며 호가 낙전당(樂全堂)데 선조(宣祖)왕의 따님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 동양위(東陽尉)이다. 동양위는 광해군 때 폐모(廢母)의 논의에 적극 반대하였으며 인조반정에는 큰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때에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끝까지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주화파(主和派)대신들이 세자를 인질로 적에게 보내어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였을 때 그는 칼로 위협하면서까지 반대했다. 뒤에 척화신(斥和臣)의 한사람으로 청나라의 심양까지 잡혀갔다가 돌아온 충의의 열사였으며 글과 글씨에도 능한 선비(志士)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동양위 신익성이 한가한 것을 좋아하여 성밖으로 나와 동문 밖의 물가에 처소를 마련하여 지냈기 때문에 동회(東淮)선생 또는 동회거사라고들 불렀던 것이다. 그때 처능스님이 동회거사 동양위의 처소를 자주 찾았으며 그로 인해 학문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경전의 어려운 부분을 묻기도 하였지만 아예 생활을 같이 하면서 유가(儒家)의 경사(經史)와 역대 대가들의 시문(詩文)등을 배우고 익혔다. 그때 그와 함께 동양위의 곁에서 시중들면서 배운 친구가 있었으니 동양위의 작은 아들 신최(申最.1619~1658)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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