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부휴선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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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부휴선사의 생애
  • 이민용
  • 승인 2008.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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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잊혀진 고승(高僧)

큰 나무그늘 속에서는 다른 나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우뚝 선 거목 밑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충분한 태양열과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부휴선수(浮休善修)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주변을 돌아다 볼 때 이러한 속언(俗言)은 잘 들어 맞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휴는 거목 밑에 자란 잡목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물을 거목화시키므로 상대적으로 그를 잡목 같게끔 왜소화시킨, 우리의 통념의 소산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어떻건 우리는 부휴대사가 살았던 시대에 서산대사(西山大師)가 한걸음 앞서 활약하였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두 인물을 비교시키고 그 어느 한쪽을 강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의 등장은 우리 불교의 중흥조(中興祖)와 같은 구실을 맡았다. 이러한 서산대사의 출현과 그 업적은 나름대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와 함께 동문(同門)의 제자로서 역시 조선대의 불교를 가름하는 부휴선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무시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부휴는 서산과 함께 부용영관(芙蓉靈觀)의 제자로서 똑같이 영락했던 조선 초기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가히 서산문중(西山門中)과 필적할만한 부휴문중(浮休門中)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산의 그늘 때문에 부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문헌에 따라서는 서산보다 부휴를 우리 불교의 정통을 이은 고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곧 송광사사적비(松廣寺寺跡碑)에 의하면 임제의 종풍(宗風)을 계승한 조선조의 고승은 부휴라고 지적하면서 서산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임제(臨濟)이래 청공(淸珙)까지 18대의 전승(傳承)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와서 태고보우(太古普愚)스님이 청공을 이었고 이후 6대의 전승이 있었으니 부휴가 곧 그 분이다’ 이밖에 송광사 개창비(松廣寺開創碑)의 기록은 위의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역시 부휴가 정통임을 말할 뿐이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에도 부휴는 응당 중요시 여겼어야 할 인물이었다.

(2) 은둔 속의 행적

부휴는 중종 38년(서기 1543)고대방(전북 남원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속성은 김씨였다. 부휴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다른 고승들의 탄생설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는 두류산(頭流山 :곧 지리산) 신명(信明)스님 밑에서 출가를 하고 부용영관을 찾아 그에게서 오랜 동안 공부를 하였다. 부용영관(芙蓉靈觀)의 제자가 되므로 해서 그는 서산과 23년의 연차가 있지만 동문의 법제자(法弟子)의 관계를 갖는 셈이다.

깊은 경지에 이르른 그는 당대의 유학의 대가이던 노수신(盧守愼)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의 장서를 7년 남짓 모두 통람하는 등 유교에 대한 소양을 넓혔다. 이러한 교우관계는 당시 배불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여건 속에서 승려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한 방편이었다고도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고승들 치고 그 문집 가운데 유학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시구(詩句)가 들어 있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

그의 박학다식은 물론 필적도 뛰어나 명성이 세상에 드날리자 사명대사와 함께 부휴를 흔히 이란(二難)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몸을 피해 덕유산으로 들어갔다가 병란(兵亂)이 가시자 가야산으로 갔다. 이러한 면은 어떻게 보면 그의 소극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그 점이 동시대의 서산이나 사명의 면모와 무척 대조적이어서 그가 오늘날 널리 알려지지 못한 요인이 되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의 행장의 기록만 볼 때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당시의 여건과 그가 몸담고 있던 불교계의 상황은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여하튼 그는 가야산 해인사에서 명나라 장수 이종성 ( 李宗城 )을 만나게 되었고 서로 대담(對談)하는 가운데 이종성은 그가 큰 그릇임을 알고 바쁜 일정 가운데 그곳에 더 머물면서 서로 지우(知友)가 됐다. 광해군 원년(서기 1609)에 송광사에서 부휴를 청하자 그의 상족제자(上足弟子)인 벽암(碧岩)을 위시하여 4백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송광사에 내려가 절을 중수(重修)하였다. 광해군 4년(서기 1612)에는 벽암각성(碧岩覺性)과 함께 광승(狂僧)의 무고(誣告)를 입어 투옥되었다. 그러다 광해군은 그를 보자 뛰어난 풍모와 수행인의 자세를 보고 오히려 하사품(下賜品)을 내려 그들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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