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비 10원 받던 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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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비 10원 받던 감격
  • 관리자
  • 승인 2007.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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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의 운수시절<2>

           이 글은 正山老師의 종횡담의 요약이다.       ㅡ 文責記者ㅡ

  1. 혜월도인의 기적

 내가 산으로 들어가던 그무렵은 우리 겨레가 정말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내가 집을 나선 것은 계해년 이었으니 그때는 1923년이다. 3 · 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4년이 되는 해였다. 나는 그 당시 불교에 관심이 있어 절에 출입하였지만, 나라를 잃었던 통분함을 어찌 새길수 있었겠는가.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폭발했던 울분이 새로운 상처가 되어서  사방에서 쫒기기도 하고 잡히기도 하고, 비분에 울먹이는 분위기가 가득 했던 때였다. 이러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분히 불법에 마음을 붙이고 외골수로 나아간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도 여러차례 동지들과 의논해서 거사를 하고 만주로 탈출할 것을 논의 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최후 결단을 가로막는 것은 첫째는 부모님에 대한 염려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힘이 너무나 미약한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치밀어 올라오는 천가지 만가지 불덩어리 같은 생각을 질끈 삼키고 불도를 공부하자고만 자신에게 타이르며 살았다.

오나가나 고성염불을 소리소리 외치고 다닌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그 무렵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 것도 나는 되도록 듣지 않으려 하였다. 그 당시 해인사에서 대중이 모여 이회광(李晦光) 주지 축출운동을 하였다든가 사찰령을 철폐하자는 운동이 일고 있었다든가 하는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귀를 막고 공부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안정사 가섭암에 머문지 반년만에 다음해 2월초에 통영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그해는 갑자년이다. 통영에서 뱃길로 부산에 이르러 당시 도명을 떨치고 많은 사람의 귀의를 모으고 있었던 신혜월(申慧月) 스님을 선암사로 찾아갔다. 마침 해제 중이어서 그랬는지 대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혜월스님을 모시고 밭을 일구고 짐을 지며 약 두 달을 지냈다. 혜월스님은 그 당시 나에게는 참으로 분별심이 없는 도인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와도 반겼고, 항상 보는 사람처럼 친절했다. 옷이나 가사라도 혹 없는 사람을 보면 있는 대로 성큼 내주었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다 털어내셨다. 어떻게나 일을 하시는지 젊은 나로서도 따르기 힘들었다. 그러나 누가 법문을 물으면 잠시도 주저없이 술술 법문이 흘러나왔다. 또한 어떻게나 친절히 일러 주시는지 어떤 때는 괭이자루 들고 밭뚝에서 법문 듣다가 해가 진 일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젊은 탓이었는지 철이 덜 들어서인지 혜월도인 밑에 오래 있지를 않었다. 다들 말하기를 먼저 경을 보고 그 다음에 참선하여야 하는 것이 수도의 정도라고 일러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강당에가서 경공부 하는 것이 첫째 과제였다. 그런데 그당시 범어사는 앞서 말한것 처럼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주는 곳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범어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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