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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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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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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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보현보살의 신앙

  보현행원 신앙은 비록 서민적이지는 못하지만 승려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전개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 불교사에 가장 혁혁한 자리를 남겨 준 원효스님만 해도 그가 오직 대중과 신라사회를 위하여 무애(無碍)의 행으로 대중 속에 들어가 불법을 폈다는 것은 이 행원사상에 의하여서였다. 원효만큼 그행이 적극적이었고 완벽한 이도 없었는데 이 원효의 행이 보현행원의 사상에 의하였다면 우리나라의 보현행원 사상은 원효 한 분만으로도 충분한 자취를 보여준 것이다.

  원효 스님이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주사(酒肆)와 요석궁까지도 드나들며 만행을 감행한 것도 그가 분황사에서 화엄경의 十회향품까지 해석하고 난 뒤인 것이다.

  원효 스님은 백부논주(百部論主)라 말한 만치 백부의 경론에 통달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것은 이 화엄경의 보현행원 사상에 크게 감명받았기 때문이며 그의 행각도 이 보현행원 사샹에 입각하여 무애도를 실천하고 거리 속에 뛰어든 것이다. 그가 화엄경의 주소를 지을 때 34품 중 제 21품에 해당하는 十회향품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주소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붓을 던진 뒤 대중 속에 들어간 것은 이 十회향품이 34품 중 가장 보현도와 보현원을 구족히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러 원효는 흔연히 절필하고 나선 것이다.

  그후 원효의 행각은 너무도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러한 원효의 출중한 행각이 이 보현행원사상에 있었다는 것을 알면 이 보현행원 사상의 힘과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효에게서 혁혁한 자취를 남긴 보현행원 사상이 그후 신라에서도 많이 나타나지만 고려 초의 균여대사에 이르러서 더욱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균여대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화엄의 대가이지만 더욱 보현 사상에 이르러서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깊이 스며줄 수 있을 정도의 강한 것이다. 그것은 균여가 화엄에 대한 대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화엄종가로서의 보현행원가를 끼어 일반 대중에게 널리 고취시켰다는 데 있다. 보현행원은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 의하여 보리심을 발하고 53선지식을 역방하는데 최후의 보현보살에게서 불타의 불가설의 공덕을 듣고 十대의 행원을 들은 것으로 행원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동체대비인 화엄사상의 최고의 목표인 것이다. 균여가 이 十종행원을 근간해서 보현행원가를 지어 모든 사람이 부르며 외우도록 했다는 것은 결국 보현사상의 실제 실현을 위하여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균여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스스로 보현행원가 十一수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의학으로 사뇌가에 능했으며 그의 추한 모습과는 달리 예술적 재지가 뛰어났다. 그리하여 이 보현행원가도 성현의 묘취에는 합하지 못했으나 제불의 마음에 부합되기를 바란다고 겸양하면서 친히 서문을 쓰고 일반 대중이 알기 쉽게 속문으로 지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천부적인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격과 겸하여 천부적인 예술성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고려의 모든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그의 다음의 신비적인 예들과 함께 노래는 사람들의 입을 거쳐 책장에도 담벽에도 여기 저기 써 있었다는 기록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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