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가 고려사회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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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가 고려사회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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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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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전통사상 현재

1.한국불교사상에 있어서의 영향

 국사이전의 고려불교는 소위 "오교구산"이라하는 신라불교가 대개 그대로 전승되었을 뿐 고려불교로서의 독창적인 특색은 없었다. 그러므로 국사당시의 불교는 여러종파가 분립된 상황에서 편집과 파벌등 대립의식이 커서 일불의 불제자로써 또는 일국의 국민으로써 동일성을 가지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화합을 파괴하고 단결의 지장을 가져와 마치 구수같이 되었다.

국사께서는 교단적인 면에서나 국가적인 면에서 이러한 폐단을 광정하여야 할 사명감과 경륜으로써 그 실행에 전력을 다하였다. 국사는 고려불교의 통일적인 통습을 하기위하여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으시고 국사자신이 먼저 제종의 교리관이나 수행관의 연구와 실천에 철저하였다.  그것은 국사의 묘지명에 의하면 " 당사의 불교를 수학하는 이로서 계율종. 법상종. 열반종. 법성종. 원융종. 선적종등이 있었는데  국사께서는 이 육종을 모두 연구하여 극치에 이르렀다.  " 하였고  선봉사 비명에는 "승통께서는 상사에 있었던 천태 현수 남산 자은 조계와 범학까지를 일시에 전료하였다." 하였으며 국사께서 송에 체류하였을 적에 적반의 일을 맡아 보던 주객원외랑 양걸이국사에게 보낸 서한에도 "뉘라서 우세승통만 하리  오종의 묘리를 전부 연구하셨네" 하였다.

국사는 학의 편견을 항상 경계하여 구사를 배우지 않으면 소승의 학설을 알지 못할 것이며 유식을 배우지 않으면 시교의 종취를 알지 못할 것이며  기신을 배우지 않으면 경교의 돈교를 알지 못할 것이며 화엄을 배우지 않으면 경교의 돈교를 알지 못할 것이며 화엄을 배우지 않으면 원융지문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오교의 궁극에 이르러면 어찌 겸학을 아니 하겠는가?  근세의 학자들이 돈오만 자청해서 권소는 멸시하면서 성상을 담론함으로써 왕왕 조소거리가 되는 이가 있으니 이는 겸학을 아니한 까닭이라"  하였다. 

국사는 국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송에 건너가 약 14개월동안 체류하는 동안에도 유승 정원 선총등과는 화엄학을 담론하고 종간등과는 천태학을 문답하고 소원택기등과는 계율학과 정토학을 논의하고 종본 천원회연 등과는 선의 요지를 결택하고 천길승등과는 범학을 문의하는 등 오십여명의 고승 선덕을 만나 불교전반의 종학을 빠짐없이 강론하였다.

국사는 자신이 비록 천태종을 창종한 일이 있지만은 이는 새 종파를 세우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삼귀일의 법화경 사상을 가져다 교와 선의 융합을  꾀하려는 데 근본목표가 있었다.  그러기에 천태종의 상관법을 가지고  선종을 포섭하여 선종 구산의 수제들을 천태종에 들어오게 하였고  한편 교종의 대표인 화엄종에 대하여는 교관쌍수에 의한 실천에 중점을 두도록 고려 화엄종을 재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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