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만행(菩薩萬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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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만행(菩薩萬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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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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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37/원효성사

원효는 부하들의 특성을 계발하는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이들을 20명을 한 단위로 하는 반을 편성하였다. 말하자면 20명씩을 한 반으로 하고 각 반에 반장을 두며 또 다섯 반을 한 군으로 하여 한 군에 대장을 두었다. 그리고 부녀자는 모두 합쳐 20여 명이어서 특수반으로 하여 가사를 돕는 가사반이라 이름 지었다. 그래서 약 4백 명의 인원을 4개 군(四個軍)으로 나누고 한 군의 인원을 백 명씩으로 하였으며 한 군에는 자연히 다섯 반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각 반에서 자기 군단 내의 반끼리 신속하게 연락할 수 있도록 줄을 이어 방울을 달았다. 그리고 원효의 방에서 각 군단과 연락할 줄을 달았다. 가령 원효가 3군단 대장을 부르려면 3군단과 연결한 줄을 잡아당겼고 다른 군단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만일 우리 산채에 무슨 변고가 생겼을 적에는 곧 줄을 잡아당겨서 신호를 하면 서로가 상응하여 적절히 처리해 나가야 할 것이오."

원효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반을 나눈 다음, 각 반별로 개개인의 재주를 따라 일을 시키되 한 사람도 노는 사람이 없고 또 어떤 한 사람만이 일을 많이 하도록 하지도 않았다. 다만 늙고 병든 이는 언제나 푹 쉬도록 하였고 각 반 내에 병자와 노약자를 돌보는 책임자를 한 사람씩 두었다. 이렇게 서너 달을 살아가니 4백여 명의 자질이 원효의 눈에 환히 비추어졌다.

그는 각 군단의 대장 네 사람을 불러 전체 대중을 재주에 따라 다시 편성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제 나도 서로 낯이 익어 전 대중의 능력을 짐작하게 되었으니 그 재주에 따라 반을 다시 짜기로 하겠소."

뱀을 잘 잡는 사람 백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이 중에서 백 명을 골라 제1 군단에 편입시키고 동냥을 잘하는 사람은 백 명을 골라 제2 군단에 넣었으며, 제 3군단은 산채 주변에 밭을 일구어 곡식과 채소를 심고 가꾸도록 하였다. 이어 제4 군단은 특별히 몸이 날래고 판단력이 좋은 사람을 골라 무술과 그밖에 적진에 들어가 염탐해 오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쳤다. 부녀자들은 먼저대로 집안에서 밥짓고 빨래하는 일을 맡겼으며 뱀도 못 잡고 동냥도 못하며 밭일도 할 수 없는 노약자들은 매일 염불을 하도록 가르쳤다.

이러고 보니 노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원효는 매일 그때 그때에 따라 부하들의 하는 일을 골고루 하면서 감독을 하였다. 특히 무술을 배우는 백 명의 날랜 사람들은 산채에서 다섯 마장을 더 올라가서 따로이 숙소를 정했으며 무술지도자로 군단의 대장 외에 네 사람을 더 선발하여 조교로 삼았다.

제4 군단은 낮과 밤의 구별이 없이 무시로 갖가지 무술을 연마하였으며 적국에 잠입하여 적국의 기밀을 알아오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자세히 배워나갔다. 원효는 제4 군단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늘 이렇게 훈계했다.

"우리 산채 대중들 중에 나라에 충성할 기회가 있는 사람으로는 오직 이 제4 군단 밖에 없을 것이오. 여러분은 나라에 충성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부지런히 연마하기 바라오."

제4 군단의 대장은 앞서 광주 땅에서 원효를 도와 그곳 젊은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친 적이 있는 원효의 호위 책임자였다. 그의 이름은 무녕〔無寧〕이고 본래 화랑 출신으로 원효의 호위를 맡기 전까지는 유신 장군의 부장(副將)으로 있었다. 상감이나 유신공이 무녕을 원효의 호위책임자로 내보낸 한 가지 사실로 미뤄보더라도 그 분들이 원효를 얼마나 아끼는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녕은 원효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지도 벌써 3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유신 장군의 의도에 회의를 품었지만 원효 가까이에서 원효의 인물됨을 헤아려 보니 새로이 깨달아지는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과연 저만하시니 상감마마께오서 요석 공주를 맡기셨지…."

그는 날이 갈수록 원효를 존경하게 되었고 근래에는 원효가 다시 사문이 되어 산으로 갈 적에는 스승으로 모시리라고 마음먹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원효는 산채의 이름을 가섭원(迦葉院)이라고 명명하였다. 뱀복이와 자기가 가섭 부처님의 제자였다는 고사(故事)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뒷날의 이야기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한 뒤에 제4 군단 대장 무녕 장군은 출가하여 원효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 가섭원을 절로 만들어 가섭암이란 액호를 달았던 것이다.

원효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때로는 땅꾼부대를 따라 사방으로 뱀을 잡으러 다녔고 때로는 동냥패를 따라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탁발도 했으며 때로는 가섭원에 남아 밭일을 돌보았다. 그리고 제4 군단의 숙소는 일주일에 두 차례씩 방문하여 무술을 지도하였다. 이렇게 갖가지 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 서라벌 사람들은 원효가 한 사람이 아니라 너댓은 되는 모양이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하는 것이었다.

원효가 가섭원을 이끈 지 3년째 접어 들자 유신 장군은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원효를 불렀다. 원효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밤에 유신 장군 댁을 방문하였다. 이미 유신 장군의 부인이 되어 첫아기까지 얻은 지조 공주는 원효를 대하자 언니인 요석 공주가 생각이 나서 원효의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우는 것이었다. 유신 장군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쩌지 못하였으나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큰스님을 모처럼 뵈오면서 울음을 보여드려서야 되겠소? 어서 차를 내오구려."

원효는 지조 공주의 눈물 짓는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난날 스스로 맺어 놓은 인연에 대하여 후회한 적도 없거니와 또한 달갑게 여긴 적도 없었다. 큰인물을 얻기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으니 후회나 긍정이란 척도로 헤아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 것이었다.

원효는 예전에 요석궁을 떠나기 전에 요석 공주가 아기를 낳으면 뭐라 이름할까를 묻는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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