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가 곧 성(誠)이요, 선(善)이요, 명(明)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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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가 곧 성(誠)이요, 선(善)이요, 명(明)이니
  • 관리자
  • 승인 2007.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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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본성생명을 키우는 길-계율

건널목에서 신호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섰노라면 금새 불어난 강물처럼 사람들은 어느새 넘치게 쌓여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부터 쏟아져 나온 것일까? 그들 틈에 끼어 네거리를 건너고 또 나도 걸어가면서 피익 혼자 고소(苦笑)를 터뜨리게 된다. “…괜히 짚신만 닳게 할 뿐이지요.” 어느 한 노사(老師)의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다. 정말이지 나는 괜히 오가면서 신발만 닳게 할 뿐이었던 것이다. 온 길을 되짚어 가고 간 길로 되돌아 오는 그 왕복밖에는 사람이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달리 없는 것도 같다. 참으로 무수한 걸음을 놓아 왔다. 걸어온 만큼의 자국엔 회한도 들어있고, 자책도 서려있는걸 어쩌지 못한다.

어느 날 좌우를 둘러보니 옆에 계시던 분이 모두 고인이 되셨다. 그날따라 망망한 하늘이 더욱 선명하였다. 조금만 더 그분들의 완고함과 혼자 앓는 깊은 상처같은 고독을 이해해 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시간과 물질과 마음대기에 인색하였던 것이다.

사는 게 그저 모두 죄인 것만 같다. 백중날 설법 중에서 위조악업은(僞造惡業恩)에 이르러 가슴 메어져 혼이 났다. 자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악업이라도 짓는다는 어버이의 은혜. 할 말을 잃고 만다. 세상에 눈이 떠지고 철이 들기까지 돌이켜 보면 잘못 아니게 없었고 죄 아닌 게 없었다. 그동안이 남의 수고 아닌 게 없었고, 남의 것을 축내어 오면서 자신의 현상을 유지해 온 것에 다름없다.

남의 살로 자기 배를 채우고, 마침내는 부모를 먹어 치우고 태어나는 거미처럼 일차적으로 우리는 부모에게 갚아도 못다 갚을 죄를 짓고 태어난 것이다. 거기에다 보탠 알게 모르게 지은 죄 또한 얼마나 많은가. 모자라는 힘을 부추기자니 악착을 떨어야 하고, 남을 이기자니 억지를 부려야 하고, 남하는 것 따라하자니 어떠한 무리도 마다하지 않고 자행하는 요즘 사람들. 무모한 용기는 많으나, 주체성도 없고 자기철학도 없이 그저 우욱 바람처럼 몰려다니는 생리. 성형수술로 너ㆍ나할 것 없이 비슷해진 얼굴과 똑같은 기성복, 아파트 안에서의 생활습성까지도 동일패턴 동일한 패션이다.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인 것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삶의 방식가지도 완전히 기성품이 되어 버렸다. 마치 거대한 수족관의 집단어족과도 흡사하다. 머리맡에 놓아 둔 자릿기의 물이 쨍하게 갈라지는 그런 정신나는 추위와 만나고 싶다. 게딱지같은 집의 사각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래도 하늘을 만나고, 시멘트로 포장된 마당이지만 사과상자를 들여서 거기엔 과꽃이 피어 있고, 누나가 동생을 업어 재우면서 영어단어를 암기하던 가난한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지금의 부에 포만해서도 아니요 단순한 감상만은 아닐 터이다. 사람답게 살던 사람끼리의 건강한 관계가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서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륜에 어긋나는 일은 저지르지 아니 하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외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아내가 정부와 짜고 남편을 살해하며, 유흥비 마련을 위한 고등학생의 살인사건 기사가 낯설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자기가 범행한 죄악이 얼마나 나쁘며, 왜 나쁜가를 알지 못하는 그 뻔뻔스러움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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