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화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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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화합
  • 관리자
  • 승인 200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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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기획/교학강좌

전시간에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에 도달했습니다. 그 원칙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음미해보면서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업인과보의 법칙이라는 것이 삼세에 걸쳐서 윤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 비교적 깊숙하게 접근해 보았습니다.

삼세윤회의 법칙이 그 자체로 갖고 있는 한계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수행을 해야 된다고 했거니와 이처럼 불교에서 표방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일관성을 갖고 있음이 특징입니다.

육근(六根)이 있고 육경(六境)이 있습니다. 언제나 시작은 여기서 하는 거예요. 육근은 육경을 인식하고 그리고 육경은 육근에 의하여 인식되면서 그렇게 인식 작용과 인식 내용을 주고 받으면서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먼저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뒤 그 존재들이 지니는 속성을 성찰하거니와 그 첫 번째가 육근에는 의지가 있고 육경은 그것에 대한 법칙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육근 및 육경에 모두 적용되는 속성이 있으니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기 때문에 결코 ‘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바로 이러한 육근·육경에 포섭되는 십이처의 세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와 같은 세상에 두 가지 길이 나타납니다. 우선 모든 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나’라고 집착하는 경우가 있어요. 소위 ‘아집(我執)’을 일으키고 있는 경우인데, 이러한 아집은 지금도 우리가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집을 일으키게 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집에 의하여 집착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또는 육근이 자신의 편함을 추구하기 위해, 또는 괴롭지 않고 무상해지지 않기 위해, 또는 그런 아집을 존속시키기 위해 업(業)을 일으키게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업이라는 것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지금까지의 강의를 통해 마무리지었다고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집을 유지하기 위한 업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그 업은 한계가 있다고 했지요.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에 입각하여 아무리 선업을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선업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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