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아닌 경계에 어찌 성인과 범부 중생이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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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아닌 경계에 어찌 성인과 범부 중생이 따로 있겠는가
  • 관리자
  • 승인 2007.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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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편양 언기(鞭羊 彦機): (1581-1644)

서산 대사의 4대 제자 가운데 가장 늦게 입문하였으면서도 가장 충실하게 심법(心法)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는 분이 편양 언기 대사이다. 대사는 서산 문하 4대 문파 가운데 가장 융성한 문파를 이루었으며, 법통(法統)을 이어 받은 분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사는 1581년(선조 14년) 현재의 경기도 안성 죽산(竹山: 조선 시대의 죽주현;竹州縣)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장(張)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현빈 인영(玄賓 印英) 대사 문하에서 출가하였다가 후에 서산 대사 문하에서 정진하였다. 현빈 대사가 서산 대사의 제자이므로, 엄밀하게는 서산 대사의 손상좌(孫上座)이겠으나, 뒤에 서산 대사의 적자(嫡子)로 평가받고 있다.

현빈 대사 문하에 있을 당시 19세로 이미 영겁(永劫) 이래로 쌓인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평안도의 목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며 지냈다. 편양(鞭羊; 양을 돌보다)이라는 법호는 이 무렵 생겼다. 22세 때 묘향산으로 가 서산 대사 문하로 들어가 정진하였다.

이후 전국의 선지식들과 교류하며 금강산, 구룡산, 묘향산 등을 돌며 법을 폈으며, 1644년 5월 10일 묘향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세수 64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내원암은 스승 서산 대사가 입적한 곳이기도 한데, 대사의 사리는 서산 대사의 부도 옆에 나란히 모셨다고 한다.

대사는 서산 대사 문하에 든 후 3년을 시봉하다 법을 이어받고, 평양성 모란봉에 움막을 짓고 머물렀다. 이 때 수백 명에 이르는 걸인들을 돌보았으니, 중생과 일체가 되어 보살행을 실천하셨다. 어느 가을, 비에 젖은 나뭇잎이 지는 것을 보고 “유가(儒家)의 학문을 익힌 바 없는데, 하물며 노자와 장자의 학문을 본 일이 있겠는가. 일찍이 서산 대사의 문하에 들어, 오로지 육조 혜능의 선(禪)만을 닦았도다”라는 게송을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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