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속의 수행과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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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속의 수행과 진리
  • 관리자
  • 승인 2007.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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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에서 건지는 깨달음 5

지난 호에서, 유위와 무위 사이의 찰나적 무한 순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욕망이라는 불의 연료를 냉동시키기 위해서 무위로 들어가야 하고 자신을 포함한 중생을 건 지기 위해서 다시 유위로 나와야 한다. 무위의 세계도 '나'가 일어나는 순간 유위로 변해 버 린다. 무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닦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찰나찰나 끊임없 이 유위와 무위 사이를 순환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물음에 만나게 된다. 유위세계의 중생은 번뇌의 뭉침인데, 번뇌의 마 음으로 닦는 수행을 통해서 어떻게 무위의 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번뇌가 어둠이라면 진리는 빛이다. 번뇌가 귀머거리라면 진리는 소리이다. 장님은 볼 수가 없고, 귀 머거리는 들을 수가 없다. 장님이 어떻게 어둠을 주물러서 빛의 세계에 이르고, 귀머거리가 어떻게 적막을 뒤져서 소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번뇌와 출세간적 진리

중생은 명칭과 형상에 의지해서 세상을 본다. 무엇인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반드시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정적인 동쪽은 없다. 우리가 정한 방향은 임시적인 것이 다. 고정적인 형상은 없다.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임시로 정한 것, 변하는 것에 매달린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 명예를 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뽐내기 위 해서 돈과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중생의 목표가 이렇다 보니 모든 노력의 초점은 여기에 맞추어진다. 따라서 중생이 정리하는 진리하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형상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중생의 진리는 번뇌로 파악한 진리요, 그것은 '있다'의 진리이다.

그러나 세상의 실제 모습은 어떤가. 찰나찰나 변하지 않는가. 아니다. 이 '변한다'는 말도 적 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고정적으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그것이 변한다 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있다고 할 것이 없다면 변할 것이 없다. 없는 것에 변한다는 말을 붙일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금년 초봄에 내린 눈이기 때문에 내리자마자 금방 녹는다. 같은 눈이 한 겨울에 내 렸다면 보다 오랫동안 녹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에 여름에 우박으로 내렸다면 더 빨리 녹았 을 것이다. 본래 눈이 있었는가. 없었다. 잠시 눈의 형태를 띠고 내렸다가 다시 본래의 물로 돌아갈 뿐이다. 본래 눈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할 때 변화를 말할 수 있다. 본래 눈이 없 었다면 변화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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