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베트남 3 호찌민 영엄사(永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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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순례기] 베트남 3 호찌민 영엄사(永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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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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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 순례기/베트남

호찌민 시는 베트남 남부 최대의 상업도시이며 지금의 이 나라 경제를 이끌어 가는 중심지 로소 인구는 약 480만이다.

'75년까지는 남베트남의 수도로서 사이공이라 불렸으나, 남북통일 후 호찌민으로 개명되었 다.

프랑스 통치시대에는 '동양의 파리' '극동이 진주'라는 등 또 하나의 수식이 덧붙여진 호찌 민, 그처럼 화려한 도시답게 서구적 센스와 세련된 건물이 즐비하다. 하지만 시내를 조금 벗 어나면 야자수의 기둥과, 그 잎으로 엮은 지붕의 집이라기보다 둥지 같은 인상의 집들이 울 창한 나무들 속에 점재(點在)해 있다. 또 강에는 크고 작은 거주용선박(居住用船舶)이 여기 저기 떠있는 등 다양한 주생활(住生活)이이 땅의 다난했던 지난날을 추측케 한다.

바람이 없어도 하늘하늘 나부낄 것만 같은 얇은 옷자락 '아오자이'를 걸친 여인들. 그러한 것들이 도처에 가지를 펼치고 있는 열대수(熱帶樹)를 배경으로 나의 그림 같은 남국적 정서 를 자아내고 있다.

역사박물관, 전쟁범죄박물관이나 구찌 터널에 가면 베트남 전쟁의 비참함에 암울한 기분이 드나 호찌민 시 거리에서는 그 흔적이 따로 보이지 않는다.

도로계획이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자국인가. 파리처럼 도로가 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선상 (放射線狀)으로 되어 있어 도시의 기능으로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바둑판 같은 길에 익숙 한 사들에게는 길 찾기에 무척 헷갈린다.

도시 복판에 위치한 파리의 노틀담 사원을 축소하여 닮은꼴로 지었다는 사이공대교회(그러 나 모두 노틀담 사원이라고 부른다.)를 보며 문득 나는 서울의 중앙청이 생각났다. 르네상스 와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충된 아름다운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제(日帝)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허물어버린 우리의 처사가 통쾌하게 느껴졌다. 한편 건물도 살아남는 것은 권부(權府) 가 아닌 신앙임에, 하물며 인간은 그 선택에서 무엇을 취함이 옳을까의 답을 얻은 것 같았 다.

내가 찾고자 한 영엄사(永嚴寺;VINHNGHIEM PAGODA)는 도심에서 멀지 않은 사이공 역 과 국제공항의 중간쯤에 있었다. 영엄사는 그 규모와 시설, 미관이 웅장하고 당당한 것 외에 도, 이 절이 1964년에 짓기 시작하여 '71년에 완공되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 장 7년이 걸린 거슨 그만두고, '63년 고딘디엠 대통령이 암살당한 다음해부터 연이은 미국 의 직접참전(65년), 대폭격(북베트남)의 와중에 건립한 터이니 경이롭기만 했다. 그 당시 한 국도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그들의 적편에 있었으니 행여 용서받지 못할 일은 없었는지... .

법당(法堂)부터 서둘러 들어간 나는 부처님께 진심로 용서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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