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高句麗滅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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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高句麗滅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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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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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원효성사

백제(百濟)의 광복군이 너무도 어이없게 괴멸한 것은 자중지란(自中之亂) 탓도 있지만 원효 의 책략이 주효한 때문이기도 했다. 원효가 광복군 진중으로 은밀히 들여보낸 두 스님, 즉 지수(智藪)와 개심(開心)이 복신(福信) 장군과 도침(道琛) 화상에게 각각 접근하여 이간책을 쓴 것이 큰 효과를 거둔 것이었다.

지수와 개심은 광복군이 무너진 뒤 곧바로 지리산으로 돌아와서 화엄경을 공부하여 수행에 열중하였다. 해외에 일종의 속국인 20여 담로(擔魯)를 두고 해상무역을 활발히 전개하며 위 풍당당하게 호령하던 백제가 결국 나당 연합군에 본국을 유린당하리라고는 그 어느 주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제는 본국을 잃었다. 본국을 잃고 나니 해외의 담로(擔魯)들이 제각기 활로를 찾아 야 했다. 동해 바다 건너의 왜국에 산재해 있는 담로들은 본국에서 파견한 10만 대군이 진 주한 것을 계기로 전 국토를 통일하는데 솔선으로 따라 주었다. 그래서 왜국은 '일본(日本)' 이라는 이름으로 통일국가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 주축은 백제의 세력이었다. 일단 일본이라 는 새 이름을 얻은 뒤 일본은 서서히 신라의 침공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백제의 광복군이 무너진후 일본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신라를 침공하는 대작전을 감행한 것 이다. 문무왕(文武王)은 일본으로 밀파한 간자들의 보고에 접하자 연일 근심으로 나날을 보 내야 했다. 물론 유신 대장군이 아직은 건재하고 원효 태사(元曉太師)가 화개동천에서 화랑 군을 재훈련시키고 있으니 당장 큰 환난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일본군의 내침을 받 게 될 것이므로 마음이 편안할 리 만무했다.

왜군이 10만대 병을 파견하여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자세히 적 혀 있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은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서 신라 왕손이다. 김부식은 신라가 배달민족(倍達民族)의 정통(正統)임을 내세우기 위해 신 라에 유리한 것만 기술하고 신라에 불리한 내용은 거의 모두 삭제했다.

그 좋은 예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에 관한 기록은 소홀히 다루고 신라에 관해서는 자세히 기술한 것이다. 왜병 10만 군이 배를 타고 신라를 침공한 사례도 아예 취급하지 않 았으니 신라 왕손인 김부식으로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무 왕대의 고승인 표훈(表訓) 법사가 쓴 범어사 사적기(梵魚寺事蹟記)에 그 기록 이 적혀 있으니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이러하다.

"왜병 10만 군이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오자 왕(문무왕)은 매양 이를 근심해 마지 않더니 하 룻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태백산 도인 스님을 청해서 남해 바닷가의 금 정산(金井山)아래에서 화엄경을 독송하고 화엄신중기도(華嚴神衆祈禱)를 드리면 가히 물리 치리다.' 하거늘 왕은 조정 신하들이 옳게 여기는지라 곧 사자(使者)를 보내어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의 의상(義湘) 큰스님을 모시고 금정(金井) 아래에서 화상은 화엄경을 독 송하고 왕은 화엄중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7일 7야를 계속하였는데 수많은 화엄신중들이 철갑을 두른 병사로 화현하여 왜병을 향해 공격하니 왜선은 산산이 부서졌고 군사는 모두 바다에 빠져 죽고야 말았다. 왕은 이 은혜에 보답하기 의상 법사에게 소원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하기를 '이 산 중턱에 가람을 크 게 일으키시면 나라를 위해 항상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니 왕은 곧 국력을 들여 가람을 창 건하니 이 절이 바로 범어사(梵魚寺)이다.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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