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眞 . 誠)을 구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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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眞 . 誠)을 구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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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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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덕 칼럼

우리들이 종교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고 안심을 얻으려고 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인간에게는 진실한 것, 참(眞) 그것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본래적인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참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항상 정신적인 결핍과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배고프면 못견디듯이, 아니 그것 이상으로 이 참을 내것으로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육체적 허기증과 정신적 갈구증의 차이일 뿐이다. 발보리심(發菩提心)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발심의 동기는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겨울에 흰 눈이 많이 온 날, 자기몸과 마음이 저 흰눈처럼 깨끗하기를 바라던 소녀시절 심정이 생각난다. 차차 성장하면서 가혹한 현실생활에 부닥치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회의기(懷疑期)가 청년시대에 뒤따른다. 대개는 이런 물음형의 한 가지를 붙잡고 괴로워하지만 '참삶'을 갈구하고, '참 나'를 알고 싶고, '참마음'을 캐고 싶다는 것이니 결국 '참(眞)'을 갈망하는 욕구가 여러 형태로 나뉘어진 것뿐이다.

많은 성직자(聖職者)들은 이 단계에서 세속적인 현실생활을 박차고, 불교로 말하면 출가(出家)의 길을 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세속적인 생활을 받아들이면서 그 의문형도 세속생활에 밀려서 흐지부지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참'을 갈망하는 것이 본구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마음 밑바닥 깊은 곳에 밀려들어갔을 뿐이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지난 5월호에 실린 "사람되어지이다"는 내가 약 25년 전에 쓴 [단군탄생(檀君誕生)]이라는 서사시에서 웅녀(熊女 곰녜)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부분을 떼내어 보인 것이다. (이 작품은 71년 가을 [신상(新像)]이라는 우리들 여성 동인지에 발표된 것인데) 곰녜의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신(變身)하는 재생(再生) 모티브가 바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발보리심'의 문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되돌아볼 때 내가 넘은 삶의 전환기에 이 글을 썼던 것이다. 나는 그 다음해에 "나는 불자(佛子)다"하는 자각을 얻었으니 내 삶의 분수령에서 쓴 글이다.

나는 그 당시 무속(巫俗), 그 중에서도 무가(巫歌)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무당들의 '굿' 놀이는 참으로 종합예술이라고 하겠는데, 종교적인 요소 외에도 노래 . 무용 . 연극 등 온갖 요소가 다 들어있고, 또 제주도 굿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그 굿의 주신(主神)의 역사를 서술하는 '본풀이'가 있다. 이것을 서사무가(敍事巫歌)라 하는데 우리가 어려서 들은 입으로 전해지는 옛날얘기들은 거의가 여기에 근원을 두는 것이다. 전설과 설화 그리고 신화(神話) 같은 구비문학(口碑文學)의 근원은 거의가 이 무가에서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고유신앙은 무속신앙이며 그것을 무교(巫敎)라고 불렀다.

단군신화는 고려 때의 일연(一然) 스님이 쓰신 {삼국유사(三國遺事)} 제1권 맨 처음 고조선(古朝鮮) 대목에 나오는 개국(開國)신화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신화는 고대인의 세계관과 인간관 내지 인생관을 나타낸다. 구약성서의 창세기(創世記)가 유대민족의 그것을 나타내듯이 우리의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의 인간창조신화이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는 고대인의 생각도 담겨져 있는 신화이다.

단군신화는 그러면 굿에서 하는 서사무가와는 관계가 없을까? 현재 제주도 굿에서는 주신의 '본풀이'가 무당들에 의해서 구전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국적으로 육지에서는 '진오기굿' (사람이 죽었을 때 하는 천도제굿)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여신인 '바리공주' 본풀이가 남아있고, 강원도 강릉지방에서 단오절에 하는 '시존굿'에서 생명을 점지하시는 삼신할머니의 본풀이로 '당곰애기'의 설화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을 여신이 관장한다는 사실도 흥미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단군신화의 곰녜를 당곰애기와 같이 삼신(生産神)의 본신으로 보고 이러한 무가가 문자로 정착된 것이 단군신화라고 본 것이 더 신이 났었다.

그보다도 그때 나는 곰녜와 나를 하나로 보는 심정이었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의 암흑감, 절망감, 그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갈망하는 마음, 곰녜는 나 한 사람일뿐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요, 인간 전체를 의미하였다. 일제(日帝)의 압박을 겪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몸으로 겪은 우리 세대는 '민족과 나'의 아픔이 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조국의 아픔을 달래는 헌시(獻詩)임을 맨 앞 허두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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