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사의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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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사의 보시
  • 관리자
  • 승인 2007.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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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그늘, 춘성(春城)스님

어느 날, 신문사에서 일에 열중해 왔는데 노신사 두 분이 내 앞에 말없이 다가와 섰다. 앉은 채 올려다보니 춘성 스님과 유담 스님 두 분이 나를 이상한 동물이라도 구경하듯이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분이 다 양복을 입고 계신 것이었다. 유담 스님은 워낙에 속가에 나가서 사시므로 평소에 양복을 자주 입으시지만 춘성 스님이 양복을 입으시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이날의 춘성 스님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귀한 영국제 양복을 입고 계시는 것이었다. 조끼를 받쳐입은 밤색 싱글에 나비 넥타이, 거기에다 카키 빛깔의 바바리 코드 차림에 챙이 짧은 회색 중절모를 쓰고 계셨다.

70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멋진 노신사가 그 희고 두꺼운 눈썹을 치켜세우고서 "내 모습이 어떠냐?"하신다. 나는 그저 "하, 멋집니다" 하였다. 그리고 "스님, 오늘은 웬일이십니까. 모양을 다 내시고" 물으니, "내가 입고 싶어서 누구에게 부탁을 했더니 해주더만" 하신다. 그리고 킬킬 웃으신다.

유담 스님은 부산에 사시는데 KBS TV에 출연하시기 위해서 서울에 오셨다고 한다. 유담 스님은 여러 가지 피리를 잘 부시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퉁소의 명인(名人)이셨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자주 방송국에 나가셔서 피리를 불고는 하셨는데 이번에는 서울 KBS TV에 출연하시게 되어 상경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분이 모처럼 만났으니 오늘 저녁에는 어디 기방(妓房)에 가서 걸직하게 한판 법석을 떨고 싶은데 두 분만 가시기는 멋쩍으니 젊은 친구를 한 사람 데리고 가기로 하고 그 젊은이로 내가 뽑혔다는 것이다.

두 분 노스님이 나를 어여삐 보시고 뽑아주신 것은 감사하나 돈 걱정이 앞섰다. 두 분에게 술값을 치루게 할 수는 없고 내가 감당하자니 호주머니가 빈약했다. 그거야 모른 척하고 있으면 노스님들께서 알아하시겠지만, 젊은 사람이 어른을 모시고 가서 술값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달라서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른을 대접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어른을 모시고 주석(酒席)을 함께 하거나 식사를 하게 되면, 단순히 음식을 먹는 일에 그치지 않고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그분들이 가진 체험을 통한 경세(經世)와 철학과 지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산 교육을 받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스승에게 답례하듯이 대접을 하였다. 그 때문에 젊은이가 어른의 접대를 받으면 그것은 결례가 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돈이 없어서 어른에게서 접대를 받았다면 그것은 더욱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방 대신에 외상이 통하는 일식집에 모시기로 했다. 핑계인즉슨 당시 군사정권이 기방은 폐지했으므로 갈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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