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자인 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서인도의 불교 교단은 남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데칸 서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지역은 기원전 2세기 이래 서방 세계와의 무역으로 인하여 활기를 띠었던 지역으로, 그 후 8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굴원이 조성된 곳이다. 인도 전역에 산재해 있는 천여 개의 불교굴원 가운데 8할 이상이 여기 데칸 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서부 데칸의 불교굴원은 주로 고대의 상업도시 가까이나 이 도시들을 잇는 교역로상에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굴원 조성이 법시(法施)와 재시(財施)의 상호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굴원의 발달과정이 곧 고대 인도의 해외무역의 성쇠와 일치한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산치에서 아잔타, 엘로라, 아우랑가바드를 따라 남하하던 길을 잠시 멈추고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고다바리(Godavari)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인도 상공업의 중심인 나시크(Nasik)에 닿는다. 고대 서데칸 불교의 중심지이기도 한 이 도시의 근교에는 24개의 불교굴원이 있다. 이 굴원군은 특히 사타바하나 왕조의 비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차이띠야(Chaitiya, 塔院)굴을 포함한 다수의 굴원들이 이 왕조의 제2대왕 칸하의 치세 동안에 조성된 것이다. 당시의 왕이 금전이나 전답을 이곳의 굴원에 기진하였다는 기록이 여럿 보이며, 때로는 한 마을 전체를 기진한 경우도 있었다.
나시크라는 서데칸 내륙의 불교 중심지와 연결하여 서해 연안에는 깐헤리 굴원이 번성하였다. 깐헤리는 당시의 교역항이었던 깔얀(Kalyan), 소빠라(Sopa-ra), 차울(Chaul)등과 인접해 있었을 뿐 아니라, 나시크나 떼르(Ter) 혹은 사따바하나 왕조의 초기 수도였던 쁘라띠슈타나와 같은 내륙의 상공업 도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이상적인 지리 조건은 깐헤리가 서데칸의 또다른 불교 중심지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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