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보현행원품강의]제1장2-4 왜 화엄조사들은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 보현행원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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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보현행원품강의]제1장2-4 왜 화엄조사들은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 보현행원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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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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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보현행원품강의]제1장2-4 왜 화엄조사들은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 보현행원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는가?

2-4.왜 화엄조사들은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 보현행원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는가?

 

 

어떤 가르침이 수행법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의례가 필요합니다. 즉, 그 가르침을 담을 수 있고 구현할 수 있는 반복적 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우리가 일반 불교 수행에서 보는 그런 구체적 틀이 없습니다. 보현행원이 좋기는 좋은데, 보현행원을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를 물을 때, 마땅히 알려줄 지침이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경제불은 어떻게 닦는 것이며, 칭찬여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구체적 틀이 없는 것입니다. 독경이라면 경을 읽으면 되고, 염불이라면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 참선이라면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되는데, 부처님을 공경하고 찬탄하라고 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과거 화엄학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그래서 무던히도 명확한 행원 수행의 틀을 만들이 위해 노력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균여대사의 보현십원가도 하나의 사례입니다. 구체적 행원 수행법의 정립이 어려우니 대사께서는 노래를 지어 노래로써 보현행원을 수행하게 하신 것은 아닌가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보현행원 자체가 생명의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로 행원 수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대표적인 예로 송나라 화엄승 진수 정원(1011-1088)의 '보현행원수증의'를 들 수 있습니다. 수증의란 불교 사상과 이론을 많은 대중이 생활 속에서 되새기고 그것은 생활 속에 체현하여 자기 생활을 바꾸어 가도록 하는 신앙 의례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수 정원은 통서연기(通敍緣起), 권수이익(勸修利益), 단좌사유(端坐思惟) 등의 열 가지 차례에 의해 행원을 닦아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을 상징하는 불상과 단(檀)을 차려 놓고 화엄경에 나오는 법좌인 7처 9회의 법회를 표현하는 그림을 걸어 두고, 그 앞에서 향과 꽃, 등불을 밝혀 공양하고 경문 독송 및 발원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활 속에 깃든 작은 잘못에서부터 진리에 어긋난 모든 버릇을 고쳐 없애 끝내 화엄이 말하는 행원의 세계에 들어라가고 합니다.

 

 

 

이 수행법은 제가 볼 때 매우 정교합니다. 진수 정원이 굉장히 신경 쓰서 고안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어쩐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경에 나오는 행원 열 가지도 어찌 보면 번잡(?)스러운데, 다시 열 가지 차례를 만들고 그 하나 하나를 익혀야 하며 거기다  관법까지 익혀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정교한 수증의가 보편적 행원 수행법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끝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보현행원은 왜 화엄 수행법으로 정립되는데 실패했을까요? 단지 이런 이유에서일 뿐일까요?

 

 

 

 

수행으로서의 보현행원이 성립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보기에는 보현행원의 무 실체성(無實體性)에 기인합니다.

 

 

보현행원은 실체(?)가 없습니다. 딱히 무엇을 보현행이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집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전부, 모든 것이라는 것. 둘째는 무아상(無我相), 즉 나라는 아상이 없는 것입니다.

 

먼저 '실체가 없다' 는 말은 '모든 것'이란 말도 됩니다. 즉, 일부가 아니라 전체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무예의 고수는 특별한 무기나 기예만이  무예가 아닙니다. 평범한 행 하나 하나, 일상의 도구 하나하나가 모두 고수에게는 필살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전부가 무기입니다.

 

또 부처님 시대의 명의 기바 이야기에서 보듯, 명의의 눈에는 약초 아닌 풀이 없는 것입니다. 산하대지의 모든 풀이 모두 병을 낫게 하는 약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딱히 명약이란 것이 없습니다.

 

 

 

또한 부자는 굳이 통장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세상 돈이 전부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도 특별한 신분증이 필요없습니다. 나라 안팎이 모두 알기 때문입니다. 빈 의자가 만인을 앉힐 수 있는 것도, 비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실체가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곳곳에 나투실 수 있는 것도, 관세음보살님이 천수천안으로 중생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실 수 있는 것도, 부처님 보살님이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이 있고 실체가 있다면 무애한 나툼이 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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