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너머] 걸으며 생명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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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너머] 걸으며 생명을 생각하다
  • 최원형
  • 승인 2016.09.0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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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나 자신과 오롯하게 만나는 시간이며 내 안에 떠도는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걷다 보면 산만하던 마음들이 마치 잘 맞춘 레고 조각처럼 꼭 알맞은 자리를 찾아 가지런히 정돈되는 걸 경험하게 된다. 끙끙거리기만 하고 도저히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던 일도 걷다 보면 의외로 쉽게 풀릴 때도 있다. 

보통 때 걸음걸이는 빠른 편인데 좀 걷자고 마음먹으면 느린 속도가 된다. 그러니 느림을 동무 삼아 걷는다.  어느 겨울, 폭설이 내리던 날이었다. 늦은 귀갓길에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리는 눈 때문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았다. 기다리길 포기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평상시라면 20분 정도 걸릴 거리였는데 그날은 한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폭설로 자동차들은 도로 위를 엉금엉금 기다시피 움직이고 있었다. 소음마저 눈 속에 갇힌 듯, 조용한 밤거리를 걸었다. 눈 내리는 밤은 전기불빛과는 달리 부드럽게 밝았다. 

순백의 눈이 쌓이니 왠지 마음도 풍성해져 어두운 밤거리를 두려움 없이 천천히 걸었다.  걷는 데 집중하느라 그랬는지 눈까지 내려서 더욱 그랬는지 그날은 걷는 동안 잡념이 비집고 들어오질 않았다. 눈이 내리는 걸 다 받아 안으려는 듯 발걸음도 재촉하지 않은 채 그렇게 걸었다. 우산이 없어 외투에 달린 모자를 쓰고 걸었는데 집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몸에서는 더운 기운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일에 지쳐 있던 마음은 어느새 말끔해졌다. 걷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날 눈을 온 몸으로 맞아가면서 걸었던 한밤중 걷기는 개운한 기억으로 내게 걷기의 미학을 확실하게 새겨줬다. 얼마 전 양평 두물머리엘 다녀왔다. 그곳에서 강을 따라 세 시간 남짓 걸었다. 

전날 저녁,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우중에 강가를 걷는 일이 안전할까 싶어 조금 근심이 되었다. 함께 걷기로 했던 지인 중 한 명이 도저히 못 가겠다는 말을 한밤중에 전해왔다. 마음이 조금 더 흔들렸으나 그럼에도 나는 새벽 네 시에 눈이 떠졌다. 비는 전날보다 많이 잦아들고 있었다. 약속장소인 국수역에 도착했을 때 더는 비가 내리지 않고 하늘은 그저 꾸물거렸다. 걷기에 딱 좋은 날씨가 우리 일행을 맞아줬다. 국수역에서부터 팔당, 양수리까지 중앙선 폐철도가 자전거도로로 바뀐 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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