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의 『초사楚辭』
정의는 옳다.
옳은 것만큼 그렇게 되기를 요구할 수 있다.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권리이다. 따라서 정의는 늘 권리와 곁들여서 이야기되었다. 이렇게 당연한 추론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어느 순간 한꺼번에 완전히 실현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투쟁과 타협을 통해서 조금씩 실현되었다. 참정권만 봐도 정의를 요구하는 권리가 얼마나 서서히 현실화되는지 알 수 있다. 신분이 해방되었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뒤늦게 투표권을 얻었다. 우리나라는 투표권을 만 20세로 규정하고 있는데, 과연 언제 19세나 18세로 확대될 수 있을까? 지식의 습득과 정보의 취급 능력으로 본다면 18세가 투표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텐데, 투표권은 아직도 만 20세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진실은 정당하다.
정당한 만큼 존중받아야 한다. 숭배가 아니라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정당화는 우격다짐이 아니라 더 나은 합리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입증이 이론적 주장의 생산인 만큼 생산의 공로를 인정할 만하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을 보더라도 진실은 등장과 함께 곧바로 금기와 터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기존의 진실과 대립하는 각도가 더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진실은 냉대와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동설이 결국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진실도 사실의 정원에서 유유히 거닐고 다니려면 희생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 비운의 시대, 그리고 슬픈 정의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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