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간주의적 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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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인간주의적 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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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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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기획 - 불교와 상담 (3)

    공감적 이해의 인식

  치료받는 사람은 치료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조건의 적극적 관심과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즉 상담자의 동사적(同事的) 자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공감적 이해”하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공감(共感)’이란 서양 사람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번역해 놓은 것으로 ‘동정(同情)’이라고 번역할 수 없어 공감이라 번역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를 상담자는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의 내면적인 준거체제를 ‘공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고 표현한다.

  여기서 ‘준거체제(準據體制)’라는 용어는 심리학적 용어로서 일상 시사용어로도 쓰이기 때문에 설명을 덧붙여 보면 ‘준거’란 기분이다. 가령 예를 들어 보면 한겨울 눈이 막 쏟아지는데 알프스 산중에서 어떤 기사가 말을 타고 호수를 찾아 헤매지만 호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실은 자신이 호수위에 서 있으니 보일 리가 없다. 호수에는 얼음이 얼어붙었고 그 위에 눈이 높이 쌓였으니 기사가 보기에는 들판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사는 호수위를 걷고 있지만 들판을 걷는 기분으로 걸었다.

  여기서 실제적 환경은 호수지만 마음의 환경은 들판이다. 다시 말해 지리적 준거는 후수이고 마음의 준거는 들판인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제대로 벌이를 못해서 조그만 집에 살고 이웃집은 이층 슬레이트집에서 잘 살면 이 아이는 등록금을 낼 때마다 ‘나도 저런 아버지가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아이의 아버지 준거는 이웃집의 아버지이고 실제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나는 돈 많이 벌어서 미국에 이주하여 미국 시민권을 따야지’하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의 조국은 미국이고 실제 몸담고 있는 조국은 한국이다. 내적(內的) 준거(準據) 즉 진짜 마음의 주인은 미국인 것이다.

    노동은 신성하다.

  사실 현대사회는 ‘준거’가 하루가 멀다 하고 달라진다. 왜냐하면 옛날과 달리 마음을 괴롭히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부지기이기 때문이다. 공장을 예로 들어 보자. 과거에는 물건을 만들 때 노동이 신성하다고 했다. 그것은 인형 하나를 만들어도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기 때문에 인현에는 나의 혼과 피땀과 욕심이 담겨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 확대된 것이요 커진 것이다.

  예술가가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라든지 조각을 해놓으면 그것은 자기의 분신이다. 내가 나 자신 밖으로 나가 형성된 것이니 결국은 ‘제2의 나’이다. 그럴 때 그 일은 신성한 것이고 고상한 일이며 따라서 참으로 성스런 노동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은 성스러울 때 ‘노동’으로의 가치가 있다. 내가 피땀 흘려 뿌려 놓은 씨가 가을에 열매를 맺을 때, 그 열매는 정말 거룩한 것이 되고, 그 노동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내가 외화(外化)된 것이기에.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납 때우는 일이거나 나사를 조이는 일이다. 그리고 나서 만들어져 나온 것을 보면 커다란 TV이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작품인가?’하고 묻는다면 납땜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나사를 조인 사람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들의 작품이 아니라고도 할 수가 없다. TV를 만들긴 만들었지만 그중에 아주 적은 부분을 손 댓을 뿐 전체를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은 일을 해도 보람이 없다. 일한 결과도 보이질 않는다.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길을 간다는 느낌도 없다. 저 사람은 뭐하고 이 사람은 뭐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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