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백로가 지나자 세상은 참으로 투명하게 가라앉았다. 별에서도 풀벌레가 우는지 어젯밤은 붓 끝에 영혼의 불꽃을 적셔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썼다.
오늘 아침에는 억만 평의 하늘을 걸어서 출근을 했다. 교단에서 첫 시간의 첫머리를, 『억만 평의 하늘을 걸어왔습니다 』라고 말했고, 무등이 그새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가을 들어 무등이, 나에게는 잘 구어진 토기(土器)처럼 보인다. 외곽지대를 돌며 불현듯 다가가 두드려 울려 보고 싶다는 생각, 이 생각 끝에는 상고(上古)까지 울릴 듯한 둔탁한 음과 토장국 냄새가 귀와 코를 한꺼번에 스치고 지나간다. 여름 장마에 맥없이 누워서 젖가슴을 풀어 흘리고 몸살을 앓던 무등이, 지혜가 든 반백(半白)의 사내처럼 툭툭 불거진 주름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잘 마른 가죽 끈이 소리를 내듯 처서에 울고 백로에 울고, 한로에는 분명한 울림을 들려 줄 것 같다.그 울림이란 우리 아기가 돌이 닥쳐서야 「어음마」라고 힘겹게 이 지상에서 최초의 한 마디 말을 완성해 내었던 그 감격적인 영혼의 소리일 것만 같다. 저 잔주름살 밑에 고여 있는 슬픔의 적요, 거기에는 백로의 날개짓과도 같고 웅덩이의 잔물결과도 같은 지혜로움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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