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육바라밀의 하나인 인욕바라밀
불교에는 우리의 불교를 완성하기 위한 수행법으로서 「六 바라밀 행」이 있다. 그 셋째 덕목이 인욕(忍辱)바라밀이다. 그 앞에 나오는 덕목들, 즉 보시(布施)와 지계(持戒)는 내가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일인데 반해, 이 인욕바라밀만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닦을 수 없고 나에게 인욕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남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수행이다.
〖2〗나를 잊는 공부가 곧 불도 수행
생각컨대, 불도를 닦는다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남들과 대립되어 있는 나, 남들과 이해 상반되어 있는 나를 이르는 것인데, 이런 상대 세계의 나를 잊어버렸을 때 그 자리에 절대 무한의 나가 드러나는 것이므로 절대무한의 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서는 상대 세계의 나를 완전히 부정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불도의 수행이라는 것은 모두 상대 세계의 나를 부정해가는 공부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를 부정하는 것이 허무주의에 빠져드는 것인 줄 착각하는 분들이 있으나, 실은 그 정반대인 것이다. 상대 세계의 「나」는 본래가 허무한 것이고 실재가 아닌 것이므로, 이러한 허무하고 실재가 아닌 것에 국집하는 것이야말로 꿈 속에서 헤매는 몽유병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참으로 있는 것, 즉 실재(實在)만이어야 하는데, 그 실재는 영원 · 절대의 것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원 · 절대의 실재는 우리 모두의 「참나(眞我)」인데 그 「참나」는 「거짓 나(假我)」인 상대 세계의 「나」가 부정되었을 때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불도 수행은 곧 이 「참나」를 남김없이 드러내자는 것이므로 곧 불도 수행이란 「거짓 나」를 잊어버리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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