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옷 입기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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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옷 입기 운동
  • 관리자
  • 승인 2009.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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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샘·우리가 살아가는 방법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좋은 그림 한 장 그려 볼려다 여기까지 왔어요···!”
사람들의 가슴팍이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걸 깨닫는데, 한 5년쯤, 사람들의 몸짓이 ‘움직이는 조각’이란 걸 깨닫는데 그 이후로 한 7년쯤의 세월이 더 걸렸나 보다.
12년 전, 이런 생각이 ‘집단 깨달음’으로 왔을 때, 우린 이 일의 이름을 ‘우리옷 입기 운동’이라 붙였다. 그 일을 시작하면서 난 깜짝 놀랐다. 그림을 그릴 양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보니 온통 이를 데 없이 천박한 영어글자 투성이지 뭔가. 그래서 아예 팔걷어부치고 속속들이 세어보니-속옷, 안경테, 신발창 등등에 박힌 것들 358개까지 세어 본 적이 있다.
우리 말과 그림, 생각을 그리려니 영어 글자 청소부터 해야 했다. 가장 ‘우리네’ 모습으로 사는 스님들도 속을 까뒤집고 보면 아마 비슷한 현상을 발견하실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 사람들의 옷차림새에서 가장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양복과 청바지였다. 왜냐하면 조각을 전공한 눈으로 보건데, 그 옷들이 우선 우리체형과 조형적으로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의 정장과 일상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름다움을 무시할 만큼 실용성이 있는가? 그도 아니었다. 그 옷들은 우리네 풍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 넥타이만 풀러도 혈압이 5도는 떨어진다는데, 고혈압이건 저혈압이건 양복에 넥타이는 다 매야 하는 걸까?
꽉 끼는 청바지를 입으면 관절손상, 위장장애에다 질염, 고환암 발생률까지 높아진다는데, 왜 청바지는 온 국민의 단체복이 되어 있는 걸까? 양복은 일년내 0℃ 내외를 유지하는 중남부 유럽 풍토에 맞는 것인데 왜 사철이 뚜렷한 애먼 땅에 와서 정장이 되어 있는 걸까? 어째서 불편한 걸 불편한 줄 모르는 이런 ‘집단환각현상’이 발생되는 걸까?
요즘 TV에서 꽉 끼는 속옷을 선전하며 ‘~편안합니다~’라고 외치는 걸 들으면 나는 중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 생각난다.
“한국 여자는 가슴과 엉덩이가 쳐졌기 때문에 일찍부터 브래이지어와 코르셋으로 체형을 바로잡아 주어야해요….”
그때 우리는 선생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그것이 우리 풍토와는 별개로 진행된 ‘어거지 문화’였음을, 우리 종족이 태생적 결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종족 다 특징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데, 십수 년이 걸린 후 난 그렇게 시간이 아까울 수 없었다.
우리 나라는 사철의 온도 차이가 극심하고, 습도가 높은데다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지이기 때문에 통풍과 여유 구조는 우리 옷이 갖추어야 할 제일 큰 덕목에 속한다.
지금도 ‘편압합니다.’는 계속되고 있다. 생명의 순리대로 사는 데는 ‘매일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구나.’ 난 옷을 만들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핫바지 저고리 한 벌이면 3대를 물린다.’는 말이 있다. 전통시대 옷이 없어 겨울에도 삼베옷 겹쳐 입고 떨며 살았을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옷을 만들면서 ‘함께 입을’생각을 한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하찮은(?) 옷 한 벌도 대를 물릴 생각을 하다니, 그런 생각만 계속되었더라도 성수대교나 삼풍참사 같은 건 없었을 것이고, 이 땅이 이렇게 공해강산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옷의 여유 구조는(옷감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나눠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풍성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우리 바지만큼 활동적인 바지를 찾기가 힘들고, 또 그것이 끊임없이 공격동작으로 이어진 우리 무예동작(택견)과 이어진 것이란 걸 발견할 때 난 다이아몬드를 찾은 것보다 더 기쁘다.
또 역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침을 받았으면서도 꿋꿋이 이 땅을 지키고 종족을 지켜온 상무정신이 배인 것이란 걸 느낄 때, 그래서 우리 역사의 저력을 느낄 때, 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상들의 지혜를 찾아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얻는 것-이 비극적인, 마지막 남은 분단의 땅에서 분단을 극복하는 힘이, 도리어 현재 한계에 달한 서구문화에 새로운 활력이 되리라 나는 믿는다.
하루는 은사님이 오셨다.
“이젠 네가 하는 일에 네 세계가 담겨가는구나.”
난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
은사님은 정색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아직 올챙이인걸요!”
“아니야 넌 개구리야.”
난 스스로에게 자문해본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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