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지 않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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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지 않는 길
  • 관리자
  • 승인 2009.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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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이름과 모습을 여읜 마음자리’-불교에서 오랫동안 수행의 목표로 삼아온 이 자리는 모두 가 하나가 되는 자리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놓지 않고 너와 내가 갈라져 잇지 않은 경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머리가 트이지 않은 데다가 일손마저 서툴러 농삿일 추스르기에는 젖비린내가 나는 풋일꾼으로서 한 해 동안 허둥대면서 배운 게 적지 않습니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두 해에 걸쳐 ‘실험학교이야기’를 ‘우리 교육’에 연재하면서 줄곧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어왔습니다. 내것 네것이 없고 함께 일하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삶터는 꿈 속에서나 그릴 수 잇다는 말이 듣기 싫어서 꿈과 현실을 넘나들 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에는 변산에 조그마한 농토를 구했습니다. 아직 학교를 떠나지 못한 터에다 출판사 일에도 발을 빼지 못한 상태에서 농사를 짓는답시고 우쭐댔으니 한 해 농사가 어찌 되었겠는지는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래도 뜻을 같이 하는 젊은 벗들과 옆에서 거들어주는 분들 덕분에 무사히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변산에는 큼직한 항아리들이 500개쯤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고구마순으로 만든 효소식품, 고추 끝물을 가려서 소금에 절인 것, 장터에 내놓아도 아무도 거들떠볼 사람이 없어 나무에 달린 채로 썩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식초로 만들 요량으로 따담아 놓은 감들로 일흔 개쯤 차있고, 나머지는 아직 모두 빈 항아리들입니다.

빈 항아리들을 모은 사연은 이렇습니다. 아다시피 물막이 공사를해서 마을이 물에 잠기거나 살기 팍팍하여 시골사람들이 보따리를 싸서 도시로 떠날 적에 맨 처음에 버림받는 것이 큰 항아리들입니다. 덩치가 커서 옮겨가기에도 거추장스러울뿐더러 옮기는 길에 깨지기 십상이요, 짐스러워서 이사비용도 많이 들고, 막상 도시로 옮겨놓아 보았자 게딱지 같은 셋방이나 달동네 판자집 어느 구석에도 놓을 자리가 없어서입니다.

이렇게 버림받고 빈집에 놓여 있던 항아리들은 동네 개구쟁이들이나 떠난 이웃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통에 심란해진 마을 어른들 손에 조만간 깨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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