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쌍계사-육조정상탑,범패연원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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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쌍계사-육조정상탑,범패연원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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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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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향기

통일 신라, 33대 성덕왕 22년(A.D.723)에 김 대비(金大悲)스님<혹은 三法스님>은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곰곰이 생각 끝에 커다란 모험을 결심하고 중국(唐)으로 건너간다.

이 때는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혜능(六祖慧能)선사가 입적(713)한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혜능선사가 입적하기전 이런 말을 남기셨다.

<“내가 죽은 후, 5~6년이 지나면 동방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나의 머리를 가져갈 것이다.” 하면서 게송(偈頌)을 지었다. “머리위로 어버이를 봉양하고, 입속에 밥을 구하네, 만(滿)의 난(難)을 만날 때는 양유(楊柳)가 관리(官吏)이다. (頭上養親 口裡須飧 遇滿之難 楊柳爲官)>

이러한 일이 있었을 때, 신라의 대비스님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육조의 정상(頂相)을 흰눈이 덮힌 계곡, 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대비스님은 중국 홍주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돈 2만냥을 주고 장 정만(張淨滿)으로 하여금 탑묘에 모셔있는 육조 혜능의 정상을 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고을의 현령 양 간(楊侃)과 자사 유무첨(柳無忝)의 수색으로 곧 잡혀서 육조의 제자인 영도스님에게 처분을 물었다.

그러나 대비스님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해동에 육조 정상을 모시고 공양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용서를 받아 육조 정상을 모시고 귀국한다.

귀국한 대비스님은 여러 곳을 물색 중 지리산 남쪽에 들어가 터를 잡고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고 육조정상을 모셨다 한다.

현 쌍계사의 창건 설화는 이렇게 전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사찰명은 신라 50대 정강왕(886~887)때에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두 개 있다하여 절 이름을 고쳤다. 문앞에 흐르는 두 개의 계곡에서 연유하여 쌍계사라 고치고, 최 치원(崔致遠)에게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 쓰게 하여 사찰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새기게 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전설과 사실(史實)에 전하여 오는 이 사찰의 창건 유래에서 육조혜능 선사의 깊은 뜻이 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진감선사의 약전

쌍계사의 창건에 대하여 두가지 설이 있는 듯 하지만, 육조 정상을 모실 당시(723)에는 사찰의 규모가 작은 금당(金堂)만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진감혜소국사(眞鑑慧昭國師) 창건설의 46대 문성왕 2년(840)과 육조 정상을 모실 때와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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