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자리 시끄러브믄 여그 또 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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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자리 시끄러브믄 여그 또 온나!”
  • 관리자
  • 승인 2009.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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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향기 / 내가 만난 부처님
“아가씨 아직도 안 자나? 요 봄밤공기가 참 수상도 하재이-. 그럼 이 할매 노래 한번 들어볼라나? ♪식어버린 님 가슴 죄가 아니오, 식지 못한 이내 가슴이 죄로다, 죄로다?-”
사위가 칠흑에 잠긴 봄밤, 지리산 자락의 한 칸짜리 오두막에서 나는 만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생면부지의 할머니께 노래를 청했다. 한참 전에 이부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이 빽빽이 들어찬 어둠의 입자들은 할머니의 노랫가락을 타고 춤을 추듯 감미로웠고 애틋한 노랫말과 함께 위안을 주었다.
10여년 전 늦봄, ‘나홀로 여행’ 길에서 할머니 한분을 우연히 만났다. 구례의 시골길을 걸어 하동의 접경에 있는 화개장터로 가던 참이었다.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기 시작해 버스를 탔다. 내남 없는 이웃인 양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군의 노인과 아낙들 사이에 놓인 보따리 속에서 닭이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낫이며 호미가 덜거덕거리는 버스 안의 풍경은 정다웠다. 처음 눈을 마주친 할머니께 화개장터에서 묵을 민박집을 여쭤봤다. 여린 체구에 야무진 눈매의 할머니는 “큰애기가 겁도 없나?” 하고 무뚝뚝하게 핀잔을 주시더니 버스가 두 정거장을 지났을 무렵 “니 할매 따라갈래?” 하셨다. 후일 여기까지 얘기하자 친구들은 흉흉한 세상에 겁도 없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나는 왠지 할머니를 따라가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가 민박을 하시나 하는 생각도 했다. 화개장터에서 버스를 내린 할머니는 인가를 지나 지리산 쪽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산비둘기가 정적을 깨고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간 곳에 거짓말처럼 오두막이 나타났다. 말없이 앞장서시던 할머니는 “내는 요 산에서 녹차 따는 일하러 온대이. 여기는 일하는 사람 쉼터고.” 하셨다. 그러곤 머릿수건으로 툭툭 바지춤 먼지를 터시고 밖으로 나가시더니 이내 저녁상을 봐오셨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에 갓 쪄낸 호박잎과 풋고추가 입맛을 돋우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일흔두 해 인생길에서 만난 희로애락을 얘기해 주셨다.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되었으나 타고난 음식솜씨로 크게 식당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자식농사를 짓고 이제 살 만하다 싶었을 때 뇌종양이 찾아왔다고 한다. 연이은 수술에 지쳤을 때 세상사 잊고 공기 좋고 물 맑은 데 가서 여생을 맞으라는 의사의 말은 사형선고나 매한가지였지만, 정작 모든 욕심을 버리고 지리산 자락에 깃드니 병세는 호전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경쾌한 도마소리에 눈을 떴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보니 할머니가 아침 준비에 바쁘셨다. 내리 두 끼를 얻어먹는 것이 송구스러워 팔을 걷어 부치니 곁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는 문득 생각난 듯 찻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 들고 나를 밖으로 이끄셨다. 할머니는 아침이슬에 젖은 야생녹차꽃잎을 찻잔에 띄워 내게 권하셨다. 향기부터 맡으라고 하면서. 그 향긋한 호사를 나는 눈물겹게 기억하고 있다. 당신 고집대로 설거지까지 마치신 할머니가 거울 앞에서 뭔가 열심히 바르고 계셨다. “할머니!” 하고 부르니 온통 흰 칠이 된 얼굴이 나를 뒤돌아봤다. 할머니는 “썬구리무다, 요거 바르면 얼굴 안 탄다 캐서-”라며 새색시처럼 수줍어하셨다. 뇌종양도 할머니의 진달래같은 마음을 꺾지 못한 것이다.
헤어지는 마당에 전화번호를 적어달라는 내게 “전화번호는 무슨! 마음자리 시끄러브믄 여그 또 온나!” 하셨다. 눈앞의 또렷한 절망 속에서도 눈부신 희망을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 그분은 내가 만난 부처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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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_ 무형문화재로부터 현대미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 말거는 일을 하는 자유기고가. 온전히 하나의 도서관이자 박물관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 듣는 이야기는 그대로 ‘산소호흡기’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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