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적 생명관과 종교적 생명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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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적 생명관과 종교적 생명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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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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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윤회를 다시 본다

 우리가 생사를 객체로서 인식한다면 죽음은 그저 삶의 종결일 뿐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객체로서 인식된 죽음과 향상은 정말로 무섭고 처참하고 섬뜩하다. 임종의 고통스러움, 바싹 야윈 몰골, 죽은 모습의 볼상사나움, 싸늘하게 식어 변색되어 가는 유체(遺體), 썩는 냄새를 충기면서 해체되어 가는 시체, 들판에서 바싹 마른소리를 내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는 해골을 생각해 볼 때면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필연적 현실이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육체와는 다른 영혼이라는 관념을 안출하여 관념적으로라도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 즉 영생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남는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이 독수리나 제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고, 고대 인도에서는 생전에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은 그 업보로 인해 개, 돼지, 벌레, 식물 등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희랍의 플라톤도 「파이도로스」를 통해서 보면 고상한 영혼은 죽은 뒤에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오지만 타락한 영혼은 사람이나 동물의 육체에 깃들어 재생한다고 믿었던 것같다. 고대 로마인들도 선량한 영혼은 죽은 뒤에 레테강의 물을 마시고 과거의 생애를 잊은 뒤에 희망하는대로의 지상의 육신으로 환생하지만 나쁜 영혼은 언제까지나 지옥에 갇혀서 그림자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대인도에서 기원한 ‘윤회(Samasara)’는 고대의 태양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윤회의 산스크리트 어원인 Samsara는 끊임없이 도는 영구순환을 의미해 유전(流轉)이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그런데 고대세계에 윤회사상이 일어난 것은 이상하게도 인도와 그리스 뿐이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전파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전파되었거나 분기된 것으로 생각되는 점도 많이 있기는 하다.

윤회의 기본구조는 우선 영혼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한 뒤에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고차적인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윤회의 표상은 사휴에 영혼이 다른 육체로 전생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까지의 윤회관은 일종의 영혼 물멸설이나 사후 생존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어서 세계 보편적인 영생관과 같은 것인데 불교 이전의 고대인도에서만은 윤회사상이 업(業)사상과 결부되어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윤회관이 사회윤리나 종교적 윤리를 밑받침하는 하나의 근거로서의 기능을 한 것이다. 이런 점은 오늘날의 불교속에서도 계속 살아있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말로 단적으로 표현되는 이런 윤회관은 사람의 행위는 항상 다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적인 힘을 만들어낸다는 업사상 또는 업력사상과 불가분리의 관계속에 있다 업력은 영혼이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되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생전에 지은 업(행위)의 선악여하에 따라 육도(六道)가운데의 합당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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